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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 shot a story

다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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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욱
tempImage3JwIoL.heic 에그타르트로 유명한 응암동 디저트 맛집 '슬랩파이'의 오후 전경


1957년에 출시된 핫셀블라드 500시리즈 필름카메라는 중형필름 한 롤이 들어있는 A12 필름백으로 6x6 정방형 이미지를 12장 “그릴” 수 있다. 굳이 찍는다고 적지 않고 그린다고 표현한 까닭은 이번 켄트미어100 흑백필름 한 롤은 거의 모든 컷을 ND필터를 끼우고 약 8초에서 22초, 어찌 보면 짧지만 어쩌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빛을 담았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닷가 방파제나 나무기둥 같은 장노출 풍경은 아니지만 그저 익숙한 동네 골목길을 걸으며 골목을 걷는 사람들과 담에 비친 그림자의 미세한 떨림을 담고 싶었다.


이제 자신 있게 중년이라 말할 수 있는 나는 요즘 고민이 부쩍 많아졌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인가. 다행히 30대의 나로부터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8년 정도 문화유산 사진에 몰입해 결국 두 권의 사진집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다시 한번 무언가에 몰입해 그 꾸준함의 끝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나는 다시 10년을 살아낼 수 있겠다는 익숙한 결론.


얼마 전 네이버 클립 크리에이터로 선정된 뒤, 일부러 멀리했던 숏폼 생태계도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짝 들여다보고 유튜브에 포트폴리오 영상을 업로드하기 위해 파이널컷프로도 만지작거려 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이나 네이버 클립은 정보가 흘러가기만 해 좀처럼 고이지 않고 유튜브는 상대적으로 프레임이 많기에 품이 많이 든다. 그래서 브런치 같은 텍스트 기반의 채널을 하나 갖고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이런저런 채널들을 활용해 그동안 짧은 글과 정지된 사진으로만 구성되었던 내 콘텐츠에 좀 더 움직임을 주고 긴 글로 살을 붙여 마당을 조금 더 확장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는 게 쉽진 않겠으나, 어차피 우리가 걷는 대부분의 길은 처음인 게 당연하다. 그 길의 끝에 섰을 때 왜 그때 선택하지 않고 포기했냐고 나 스스로를 책망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회사 생활과 육아,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회사원은 퇴근길에 을지로 3가 망우삼림에 들러 현상 스캔을 맡긴 필름 사진이 넘어오면 출퇴근길 좁은 지하철 안에서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며 끄적였던 짧은 글들을 모아 가뭄에 콩 나듯 브런치에 글을 쓰곤 했다. 생각해 보니 공들여 담은 12장의 그림을 핑계로 12개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게 어쩌면 나의 천직이 아닐까. 지하철 안에서 만든 싱글 앨범들을 모아 몇 곡의 신곡들과 함께 묶어 앨범으로 브런치에 발매하면 어떨까. 꽤나 고전적이고 안정적인 방법이지 않은가.


사진 속 이 날은 내가 애정하는 디저트가게인 응암동 '슬랩파이'에 들렀다. 고민하다가 후르츠산도 대신 시즌 한정 몽블랑을 주문했는데, 아메리카노와 몽블랑을 앞에 둔 일요일 오후 모처럼의 자유시간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맞은편 자리에 일찍 도착한 가을이 마주 앉아 있는 듯했다. 앞으로는 화요일과 금요일, 일주일에 두 번은 야근을 하더라도 브런치에 글을 올릴 것이다. 2016년 8월 26일, 내가 브런치에 처음 썼던 글도 그랬다. 먼 길을 가려면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실행하는 게 중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이기주 작가님의 글귀를 잠깐 빌리자면, 여전히 많은 것들이 가능하다. 그리고 우린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다시, 시작. 그로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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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selblad, Planar CB 80mm F2.8 T*

HARMAN Kentmere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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