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산15
작년 가을에 일본 교토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행 일정 중 하루 정도는 비가 내리길 바랐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여행지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었고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은 비가 내릴 때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끼가 가득한 은각사, 단풍이 물든 기요미즈데라 그리고 교토의 밤 골목이 그랬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그 매력이 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행 중에 비를 만나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큰 행운을 만날 수 있었다.
올해 여름 휴가를 좀 일찍 쓰게 되어서 지난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간 제주도에 다녀왔다. 첫째 날 저녁부터 날씨가 흐려지더니 밤부터 다음 날까지 계속 비가 내렸다. 급히 일정을 조정해서 원래 마지막 날로 예정되어 있던 비자림을 둘째 날 가기로 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비가 내릴 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내 직감이 정확히 맞았다.
비가 내리는 비자림은 환상적이었다.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곳을 지켜온 나무들이 뿜어내는 신선한 공기와 초록의 향이 손에 잡힐 듯하고 심지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굵은 빗방울과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아 마음이 차분해졌다. 땅에서는 고소한 흙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아예 신발을 벗고 흙을 밟으며 맨발로 걷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숲속에서 나무들과 함께 있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도시 생활에 찌들어 있던 나를 자연이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숲을 통해 치유되고 있었다.
언젠가 인터넷 기사에서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의 무대가 되는 숲을 일본 규슈 남단의 야쿠시마 숲에서 영감을 얻어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회가 된다면 꼭 그 숲에 가봐야겠다고 줄곧 생각했다. 이번에 비자림을 경험하면서 그런 갈증이 조금 해소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숲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더욱 커졌다. 물론 비자림이 야쿠시마와 다른 점도 있겠지만 거대한 숲이 그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아마 같지 않을까.
제주도를 여행하던 도중 아내와 제주도의 개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결국 우린 개발하지 않는 것이 제주를 위해 가장 좋은 개발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비자림과 더불어 또 다른 아름다운 숲으로 알려진 제주 구좌읍의 곶자왈 숲에 한 민간 기업이 사파리 개발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자본주의에 눈이 먼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 이미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원하다 끝내 손에 쥔 모든 걸 잃고 자멸한다. 제주의 자연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그대로 완벽하다. 더 이상 무분별한 개발 없이 우리의 후손에게 원형 그대로 전해져야 할 소중한 유산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