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내 포지션은 어디라고요?
소비로 행복을 찾던 시기가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곧 쇼핑시간이었다. 휴대폰에 얼굴을 박고 조금이라도 혹하는 것은 신용카드로 긁어댔다. 늦은 퇴근 후, 요새 같은 방으로 돌아와 누리는 유일한 기쁨은 택배 상자를 뜯어보는 거였다. 지난주, 필라테스를 가려고 옷을 챙기다가 피트니스 레깅스가 다섯 개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와 동시에 남은 열몇 회를 채우고 나면 백수인 내게 재등록할 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없는 것보단 많은 게 낫다며 허허 웃고 말았다.
퇴사 후 3달이 흘렀다. 주변의 퇴사인들을 보면 마치 이별 후 후폭풍처럼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는 사람이 많다. 생각보다 어려운 재취업과 각박한 이 세상 속에서... 그냥 조금 더 참아볼 걸 후회한다는 그런 이야기. 하루에 3번씩 은행 어플을 켜 잔고를 확인하고, 알바몬 사이트에서 몇 년 전에 만든 듯한 비밀번호 찾기를 하면서 아주 조금 후회가 올라오는 듯했으나 아직까지는 괜찮다. 솔직히 말하면, 퇴사하길 아주 잘했다고 생각한다.
스물일곱 해를 살아내면서 나의 주인은 늘 불안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과거를 후회하기' 보다는 '미래를 불안해하는' 축이었다. 불안은 일종의 원동력이었다.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조금씩 자랐다. 때로는 정도가 심해서 불안에 휩싸인 나머지 현실을 돌보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불안 속에서 재차 점검하고 걱정하고 힘겹게 나아가는 덕에 이미 지난 일들엔 미련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넘칠 지경인 입지도 않는 옷더미를 보면서, 서랍장에 꾸역꾸역 쌓여있는 뜯지도 않은 화장품들을 보며. 태어나 처음으로 어쩌면 내가 생각보다 긍정적인 성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후회와 불안 사이 내 포지션은 어디인가 진지하게 고뇌하는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