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는 외로운 여자야

P를 처음 만난 날

by 이마치


경영학과 학생이었으나 국문학과 수업을 종종 듣곤 했다. 부전공이기도 했고, 조직행동론이니 재무회계니 보다는 그 편이 더 좋았다. 인문대학은 복수전공생이나 부전공생이 많지 않았다. 경영학 전공생이 국문학 부전공을 선택한 건 희귀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매 강의 출석을 부를 때마다 교수님, 그리고 동료 수강생들의 주목을 받았다. 좋은 쪽은 아니었다. 무엇을 하든 교수님은 '아, 경영학과 그 학생?'이라고 나를 불렀고, 난 최대한 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수업들 중 하나에서 P를 만났다.


영화 한 편을 정해 학기 내 소논문을 완성하는 강의였다. 소논문 요약본을 PPT로 만들어 수강생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름 모를 어떤 남학생이 준비한 영화는 '500일의 썸머'였다. 마침 그 영화를 2주 전에 보았기에 기대에 차서 발표를 들었다. Q&A 시간이 왔고 P는 발표자에게 '썸머같이 나쁜 여자를 만나본 적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둘의 대화가 오고 갔다. 눈에 띠지 않도록 노력했던 지난 몇 학기를 잊은 채 손을 번쩍 들었다. '썸머가 왜 나쁜년인가요? 썸머는 그냥 외로운 여자인데요.'


종강 날 등교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던 중에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다. P였다. 친해지고 싶다고 했다. 강의실에 들어서며 P에게 시험을 보고 술 한잔 하자 했다. 그렇게 P와 만났다. 더운 여름날의 시작이었다.



이게 운명이라고 믿었다. 내가 썸머가 되고, 저 남자가 톰이 된 것이라고. 500일을 훌쩍 넘겨 두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을 보내도록 둘은 좋았다. 결말만 다른 500일의 썸머가 아니겠냐며 웃었다. The smith의 'Please, Please, Plase, Let me get what I want'를 서투른 기타로 반주하며 부른 노래가 늦은 새벽이면 전화너머 날아들곤 했다. 사랑이 가득 찬 그런 음성들을 들으면 내일 곧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항상 썸머가 외로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톰의 이기심에 그녀도 지친 거라고 생각했다. 톰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썸머를 사랑했던 거라고, 썸머는 그 시간들 동안 외로웠고 그러니 확신을 줄 수 없던 거라고. 2년간의 연애기간 동안 내가 톰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코끝이 찡하게 춥던 겨울의 끝, 나와 P는 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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