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로 남자친구와 다툴 줄 상상도 못했다
스물셋의 봄,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나는 방송국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사무실에 대단히 많은 TV가 설치되어 있었고, 구조 과정을 하루 종일 생중계로 지켜봤다.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오전 업무를 보며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애들이 탄 배가 사고가 났대, 곧 구하겠지' 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전원 구조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했을 때, 사무실을 휘감던 우울과 충격의 기운을 잊지 못한다.
2014년, 우리나라는 모두 사회적 우울증을 앓았다.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이들도 날마다 송출되는 뉴스에 노출되며 가슴앓이를 했다. 내 남동생은 그 당시 스무 살이었고, 엄마는 9시 뉴스를 보며 마치 내 아들인 양 눈물을 훔쳐댔다. 버스에도 지하철에도 뉴스를 보며 안타까워하는 사람 천지였다. 나는 건너 건너도 아는 이가 없었지만 유난히 앓았다. 사고에 대한 감정적 동요가 심해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K의 아버지는 경찰 고위직이었다. K도 참사 과정을 미디어로 함께 지켜봤으나, 그가 경험한 세상은 나와 달랐다. K의 아버지, 삼촌들, 그리고 성장과정에서 만난 어른들은 대부분이 경찰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광화문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2주간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했다. K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하면서도 아버지를 가엽게 여겼다.
삼청동에서 데이트를 하고 광화문까지 걸어 내려오는 길에 시위대를 만났다. 유가족의 단식투쟁이 연이어 이어질 무렵이었다. 강경한 시위대 앞에 의경들은 이리저리 분주히 뛰어다녔다. 나는 K에게 물대포에 대해 얘기했다. 외부적인(정치적인) 입지와 관계없이, 가족을 잃은 저 사람들은 저렇게 간절하잖아. 무력진압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 나는 그때처럼 차가운 K의 표정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밤새 일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지난 30년에 대해 얘기했다. 광장에 나온 저들 말고 의경들을 보라 했다. 네 동생과 동갑인 애들이 태반인데 쟤네 저렇게 고생을 해. 경찰이 잘못을 한 거야?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스물셋이었고, 남자친구와는 늘 달콤하고 가벼운 얘기를 나눴다. 정치적, 사회적 이슈와 견해에 대해 나눈 경험이 없었다. 다시 말해, 살면서 이런 일로 남자친구와 다투게 될 줄 몰랐다.
K가 나빴다고 매도하고 싶은 건 아니다. 글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지만, 나는 K를 가까이서 오래 봤고 그를 잘 안다. 때문에 K의 생각을 천 퍼센트 이해한다. 그저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늘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것. 또 어떤 부분은 절대적으로 설득될 수 없다는 것. 이런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면 우리는 오래 함께할 수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