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서촌

골목마다 네가 보였다

by 이마치


금요일 밤, 친구와 서촌에서 약속을 잡았다. 카페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비 내리는 거리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골목마다 K가 보였다. 우리 여기 추억이 참 많은데.


K는 효자동에 살았다. 우리는 거의 매주 경복궁역부터 삼청동까지, 그 일대를 걷고 또 걸었다. 어떤 날은 대림미술관에 갔고, 어떤 날은 통인시장 기름떡볶이를 사 먹었다. 골목 어딘가에 있는 무료 전시 갤러리를 찾아 헤맸고, 윤동주 문학관에 가서 몇 번이고 시를 읽기도 했다. 쭈꾸미 진짜 맛있는 집 있었는데, 엄청 매운 집이었는데 한 열 번은 갔던 것 같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이면 한낮에도 길가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데이트 하기 참 좋은 날들이었고, 참 적당한 공간들이었다.


경복궁역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던킨도너츠가 있었다. 그 앞에서 매주 만났다. 하루는 늦은 K에게 너네 집 코앞까지 내가 오는데도 늦냐며 화내던 기억. 그런 내게 땀을 뻘뻘 흘리며 맛있다던 고로케을 사서 쥐어주던 사람. 서촌은 내게 이 모든 기억들을 준 공간이었다.

공간이 주는 추억은 대단히 강렬하다. 그와 이별하고도 수백 번을 지나쳤다. 통학버스는 창덕궁을 지나 안국역, 경복궁역을 지나쳐갔다. 가끔 오른쪽 창가에 앉을 때마다 경복궁 정류장이 다가오면 눈을 질끈 감았다. 골목골목마다 K가 보였다. 떠들었던 대화들, 그의 농담들이 영상처럼 눈앞에 보였다. 차마 눈뜨고 지나칠 수 없어서 다음 정류장 음성안내가 나올 때까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술 먹고 집에 돌아가는 날이면 꼭 반대편에 앉아 눈을 감고 이어폰을 꼈다.


이 공간에서 내가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제 아무렇지 않게 이 동네를 걸어 다니며 상권이 어떻고 매출이 어떻고 얘기를 한다. 이사 갔다는 소식 전해 들었다. 여기는 종로 한복판이니, 가끔 올 일이 있지 않을까. K도 이 공간에 들어올 때면 내 생각을 하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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