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갔다

노란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by 이마치


아빠가 아닌 남자랑 가본 생애 최초의 여행이었다. 정동진행 밤기차.


무슨 바람이 불어서였는지 정동진에 밤기차를 타고 가서 일출을 보자며 의기투합했다. 엄마한테 친구 집에서 잔다고 미리 뻥을 쳐둔 다음 Y의 집에 갔다. 낮잠도 좀 자고 피자 한판 시켜서 빈둥대다가 청량리역으로 출발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친구 집에서 수면바지 입고 미리 찍어둔 사진을 엄마한테 전송했고. 모든 것이 수월하게 흘러갔다.


눈을 뜨니 바다긴 바다였는데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새벽 4시쯤엔가 기차역에 도착했는데 주변에 흔하디 흔한 카페 하나가 없어서 추위에 덜덜 떨었다. 연말연초도 아니고 평일이었으므로 다른 관광객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한 시간 반 가량을 처량하게 벤치에 앉아있자니 고역이었다. 졸렸고, 추웠다.


Y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나를 격려하려 애를 썼는데, 그가 가진 비법 중 하나가 노래를 불러주는 거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노래 잘하는 남자라면 일단 반하고 본다.) 모래사장에 핀 민들레랑 비슷하게 생긴 꽃을 하나 주워와서는 뜨거운 감자의 고백을 불러댔다. 이게 아닌데~ 내 마음은 이게 아닌데~ 그 노래를 열 번쯤 완창 하니까 해가 조금씩 뜨더라고. 왠지 추운 것도 덜했다.


달이 차고 내 마음도 차고
이대로 담아두기엔 너무 안타까워
너를 향해 가는데

달은 나에게 오라 손짓하고 귓속에 얘길 하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야

제일 맘에 드는 옷을 입고
노란 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널 바라보다 그만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네

이게 아닌데 내 맘은 이게 아닌데
널 위해 준비한 오백 가지 멋진 말이 남았는데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이 아니야
그보다 더욱더 로맨틱하고 달콤한 말을 준비했단 말이야


연애라는 게 참 우스워. 그렇게 찬란하고 행복하던 게 어쩜 이렇게 감정의 잔재조차 안남을 수가 있는지. 한 때는 이 노래를 들으면 근육 안쪽부터 막 간질간질했거든. 지금은 좀 질려서 그냥 다음 곡으로 넘겨버려. 지금 가사를 다시 찾아보니까 '노란 꽃'이라는 가사가 있었구나. 그 민들레 같던 꽃도 뭐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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