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슬픔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2016년 여름, 외할아버지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몇 번의 큰 수술과 자잘한 폐렴 앓이를 지나온 후였다. 전날 위급하다는 연락이 왔고 엄마와 아빠는 서둘러 대구로 내려갔다. 사망시각에 나는 근무 중이었고 아빠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하자마자 담당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KTX를 예매하고 동대구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엄마는 그 와중에도 다 큰 딸이 혼자 장례식장을 잘 찾아오는지가 걱정이었다.
외할아버지와의 기억은 흐릿하고 희미하다. 어린 시절에 외가댁에 가면 비슷한 장면뿐이었다. 백발이 성성하고 자세가 꼿꼿하던 그가 늘 같은 자리에 앉아 TV를 보던 모습. 채널은 KBS 고정이었고 9시 뉴스가 끝나면 조용히 잠자리를 준비해 누웠다. 새벽녘 들리던 옆방의 가래 끓던 기침소리. 대학교 수시를 준비하면서 외할아버지가 6.25 참전용사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전후에 그는 미군부대에서 일했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엘리트였다고 한다. 외가댁은 동네에서 처음으로 컬러 TV를 들여놓은 부잣집이었다. 폐가 아프기 전에는 소주를 궤짝으로 마시던 주당이어서 집에는 양주가 가득했다. 작은 일에 호들갑 떨지 않는 점잖은 노인. 무뚝뚝하지만 강단있던 나의 할아버지.
스물넷 여름, 남자친구와 내일로 여행을 떠났다. 물론 엄마에게는 친한 친구와 둘이 간다고 둘러댔다. 대구가 루트에 있다는 걸 엄마가 알게 되었고 이러쿵저러쿵 거짓말을 더 하기 싫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외가댁에 잠깐 들리겠다고 약속했다. 혼자 버스를 타고 외가댁에 1시쯤 도착했을까. 할아버지는 나를 위해 간짜장과 탕수육을 시켰다. 나중에 엄마한테 그날의 메뉴를 전했더니, 우리 아빠 손녀 왔다고 탕수육도 시켰네, 했는데.
엄마는 3일 내내 울지 않았다. 나는 아빠가 밉지만, 종종 그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터진다. 그래서 그 모든 상황이 이상했다. 엄마뿐만 아니라 이모 둘도 거의 울지 않았다. 그녀들은 밤이 늦어 조문객이 끊기자 자식들을 챙겨 옆 쪽방에 욱여넣고 재웠다. 부지런히 장례식 절차를 살피고 비용을 계산했다. 바쁘지 않은 시간에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게도 큰 슬픔이었지만, 그보다 엄마를 보는 것이 슬퍼 견딜 수 없었다. 쏟아지는 눈물이 슬픔을 빠르게 죽인다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그녀가 펑펑 울기를 바랐다. 운구차에 태워지고 화장이 끝났을 때도 엄마는 울지 않았다. 불길에 휩싸인 외할아버지의 육신을 보며,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납골당에서 엄마가 내게 건넨 말은 할아버지를 모셔둔 자리를 한 장 찍어 당신에게 보내달라는 말 뿐이었다.
요즘에도 가끔 생각한다. 슬픔을 표출하지 않고 감내하는 어른에 대해. 당면한 슬픔보다 책임과 의무가 많은 나이에 대해. 그날의 엄마와 이모들에 대해. 그리고 어쩌면 이삼십 년 후에 다가올 나의 아빠의 죽음에 대해. 미래의 그날의 나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