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그리고 골룸
회사에 '그분'만 안 계시면
내 인생이 천국일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풋풋할 수 있었던 20대 얼굴 피부는
스트레스성 급성 여드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만 없다면...
이 모든 악몽이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회사에서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회사의 사장님이었으니.
그 시절, 영화 <반지의 제왕>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고,
나는 그를 골룸이라 적었다.
내 일기장 가득히.
키가 작았고, 머리숱이 많지 않은 데다
반지에 대한 집착 어린 표정도 비슷했기에.
<반지의 제왕>을 감동적으로 감상한 후
고비를 겨우 넘으면 또 다른 고비가 준비되어있던
주인공 프로도에 20대의 나는 깊이 감정이입이 되어 있었다.
원치 않아도 골롬과 함께 여정을 계속 가야 하는 것도
어쩜 그렇게 나와 비슷했던지.
그래서 영화의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해
힌트를 던지고 사라지는
흰 수염 할아버지, 간달프가 나타나면
반가워하며 그의 대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스크린을 넘어서
이번 고비를 넘게 해 줄 것 같은 인생 지침 같았다.
지극히 나중심적인 영화의 결정적인 한 장면.
프로도가 골룸을 없애버릴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간달프는 프로도를 막아섰다.
"왜 그를 없애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지?
그는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기억 감퇴 탓.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회사의 골룸이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라고만 믿었던 나에게
간달프의 그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의 말대로 골룸은 프로도가 일을 성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나의 이야기 또한 결론을 얘기하자면,
회사에서 살던 골룸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날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경력도, 능력도 없던 내가
잡지를 혼자 만들게 되었다. (그것도 날마다 울면서)
당시에는 신경과민증이 걸릴 만큼 힘들었지만
그 경력은 이후 프리랜서 일을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절대반지를 운반하고 있나 보다.
골롬같은 이들이 여전히 내 인생에 함께 하고 있다.
인생의 지난 에피소드를 다시 꺼낸 이유는,
최근에 다시 떠올리게 된 교훈 때문이었다.
인생에 골룸 같은 이들이 주변에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란 생각을 잠깐 해봤다.
뭐.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겠냐만은.
그런데 요즘 세상이 하도 신기해져서,
부딪히는 돌을 만나고 싶지 않다면,
누구도 부딪히지 않고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코로나 덕분에, 집콕을 하면서
잠시 동안 그렇게 부딪히는 돌 없이
살아볼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편했다. 좋았다.
그런데, 결국 부딪히는 돌을 다 제거한 삶의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타인이 없는 세상, 불편하게 만드는 그 누군가가 없는 세상에
익숙해진 자아는 점점 더 깊은 굴로 들어가게 되더라.
그리고, 그 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결국 생각하지 못한
'부딪히는 돌'을 만난다.
어느새 골롬의 표정을 지으며
절대반지를 쓰다듬고 있는 한 사람.
....
아마, 영화 속에서 골룸도 아무도 없는 굴 속에서
절대반지만 끌어안고 숨어 살았던 것 같다.
(이것 또한 기억력 감퇴로 확신할 수 없다.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