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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음 Sep 20. 2020

그렇게 사랑을 믿게 되었다

완전한 존재와 불완전한 존재의 사랑이란

어렵게 찾은줄 알았지만 그가 나를 발견했고 @Leeeum


넉넉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자는

두가지 감정을 가지게 된다.


사랑에 대한 무모한 열망.

또는 사랑에 대한 차가운 불신.

열망과 불신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사랑에 대해 불신했기에

창조자의 사랑 또한 믿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반복적으로 들으며

머릿속에 새겨진 문장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주입식 교육의 폐단처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 말이 진실인지 의심해보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지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선배를 만나고

사랑에 대한 간절함과 의심에 휩싸여 버렸다.


"예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것 같아."


확신에 찬 선배의 말에 느낀 당혹감 그리고

그 뒤에 밀려오던 부러움.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주저함 없이 말해본 적이 있던가.

하물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한 사랑은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기억에 흔적을 남긴 사랑은,

서로의 불완전함에 부딪혀 상처 나고 깨져

결국 이별로 끝이 나는 새드엔딩이었다.


그런 사랑에 대한 경험 안에서,

창조주의 사랑도 추측해볼 뿐이었다.

그 지점에서 사랑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시작되었다.


사랑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불완전함이

불완전한 사랑을 만들었다.

상처와 가시가 있는 이들의 사랑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로를 찌르는

시간의 반복일 뿐이었다.


사랑이 온전한 것이 아닌

불완전한, 믿지 못할 것이라는 나의 결론은,

불완전한 두 존재의 사랑만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에 대해 최선을 다하려는 진심을 가졌어도,

사람의 사랑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을 나누는 두 존재 중, 한쪽이 완전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랑도 달라진다.

완전한 존재는 다른 한쪽의 불완전함을 덮을 수 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랑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이 세상에서

완벽한 상대를 만나, 완벽한 사랑을 경험해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닌,

당연한 것이었다.


완전한 사랑을 깨닫고, 그 안에 머물 수 있게 되면서

불완전한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은,

서로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채워가는 과정이었다.

그러한 수고와 노력이 쌓이며   

완전한 사랑에서 느낄 수 있는

만족감과 안정감이 조금씩 채워져갔다.



창조주와 인간의 사랑이

완전한 것이 아닌 마치 어긋나간 사랑처럼 보이는 이유는,

시간과 공간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두 존재의 사랑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형태가 만들어지고 선명해진다.


창조주의 시간과 공간,

인간의 시간과 공간은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고도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 같고,

응답받지 못한 것과 같은 절망 가운데 낙심하기도 한다.


완전한 창조주로  완전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다른 두 존재의 사랑이기에

오해와 불신이 생겨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말씀하신다.


너무나도 다른 두 존재가

사랑하는 방법은, 믿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당신이 불완전한 나를

사랑으로 덮고 있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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