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만테냐
그와 사내 비밀연애를 하던 시절. 그는(지금은 남편이라 부르는) 이제 막 입봉한 촬영감독이었고 저는 첫 프로그램을 맡게 된 연출팀 막내였지요. 3분 길이의 짧은 영상 클립을 제작하기 위해 나간 야외 촬영. 연애는 둘째치고 대작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나섰지만.... 열정에 이글거리는 나의 마음과 달리 그는 한없이 느긋했습니다. 촬영 장소에 도착해도 카메라를 쉽사리 꺼내지 않고 그저 어슬렁어슬렁. 풍경을 바라보며 배회할 뿐이었지요. (연애 시절이니만큼 꾸욱- 참으며..)
자신의 마음에 드는 풍경을 발견하면, 이제는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시선의 높이를 달리해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드디어! 차 안에서 대포처럼 커다란 ENG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당시 테이프를 넣어 사용하던 ENG 카메라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죠. 그래서 남자 친구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콕콕 박여있었으나 지금은 아기 손바닥처럼 보들보들)
촬영을 마치고 영상을 편집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장면이라도 어느 위치에서, 어느 높이의 앵글에서 담느냐에 따라 정말 다른 느낌을 전달하는구나!.'
500년 전, 안드레아 만테냐는 놀라운 시점으로 그리스도를 그려냅니다. 그리스도의 발끝에 앉아서 바라보는 듯한 작품 <죽은 그리스도>. 만테냐의 명성을 모르던 시절, 우연히 작품을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못에 살덩어리가 뜯겨나간 자국. 그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 같아 몸서리치며 작품을 지나쳤지요. 화려한 영상에 흠뻑 젖어있던 눈으로 봐도 놀라웠습니다. 500여 년 전에 살던 이들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작품 앞에 선 이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발끝에 앉게 됩니다. 발바닥의 살가죽이 벌어진 뚫린 못 자국에 한번 놀라고. 그의 다리를 따라 올라간 시선은 손등에서 멈춥니다. 힘없이 꺾여있는 손가락과 손등의 못 자국. 갈비뼈가 드러난 상체 옆으로 보이는 세 사람의 모습이 잘려나간 듯 그려져 있습니다.
요한의 기도하는 손과 늙은 마리아의 깊은 주름. 보일 듯 말 듯 그려진 울음을 토해내는 막달라 마리아의 벌어진 입. 이들의 슬픔이 향하는 곳에 예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을 경험한 인간의 얼굴. 그의 두 눈 사이에 남은 미간의 주름은 십자가의 형벌이 조금 전에 끝난 듯 아직도 선명합니다.
묘사에 능한 만테냐는 예수님의 몸에 난 다른 상흔은 생략해 버렸습니다. 오직 못 자국만을 남겨두었지요.
못자국은 십자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살덩어리가 떨어져 나간 못자국을 본 이들은 십자가의 잔인함을 상상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벌어진 인간의 폭력과 악함에 몸서리치게 됩니다. 그는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합니다. 마치 작품을 다 그리고 나서 작품을 잘라낸 것처럼 세 인물의 몸은 화면 밖으로 벗어나 있습니다.
간절함은 이전에 없던 길을 만들어내고는 합니다. 500여년 전에 어떻게 이런 시점과 구도를 떠올렸을까요? 만테냐의 간절함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만테냐의 그림에서 발견한 낯선 시선. 익숙한 마음을 깨는 도끼가 되어 굳은 생각을 깨고 새로운 묵상과 감정이 들어갈 틈을 내어주네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의 못자국을 새롭게 보여주기 위해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했을까요? 만테냐의 사유의 시간에 나의 묵상을 겹쳐봅니다.
인간의 폭력과 잔인함으로 살덩어리가 떨어져 나간 못자국.
온 몸으로 인간의 악함을 끌어안은 십자가의 시간.
가장 잔인한 시간에 드러난 사랑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는 자신의 장례식을 위한 그림으로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테냐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랫동안 화실에 놓여있던 작품은 가족들에 의해 발견되었지요. 하지만, 빚을 갚아야 했던 가족들에 의해 작품은 다른 이에게 보내졌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