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배야!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나 보고 사와"

- 새로운 결심에 앞서 뒤져봐야 할 것들 -

by 이음음


엄마가 들이닥쳤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고는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습니다.


"기지배야, 이렇게 호박이랑

양배추랑 다 썩어빠지는데 또 사 왔어!"


쪼글쪼글해진 호박과 양배추가 냉장고 서랍 칸에서

굴러다니는 모습에 고개를 떨굽니다.

'욕먹을 만하네'


냉장고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보지도 않고

마트로 향하는 나쁜 습관 때문입니다.


자장면을 먹으면서도 그렇습니다.

단무지를 집어 들고 보면

그릇 안에는 이미 한입 베어 먹은

단무지가 자장면을 잔뜩 묻힌 채 쓰러져 있습니다.

상태가 심각할 때는 내 그릇 안의 단무지는 잊어버리고

친구가 베어 먹고 내려놓은 단무지를 우적우적 씹어먹기도 합니다.

"야, 그거 내가 먹던 단무지거든!"


왜 이러는 걸까요?


20대부터 시작된 '치매 말기 증상'으로

내가 뭘 가지고 있는지를 자꾸 잊어버리는 걸까요?

(치매 말기는 병명이 아닌 별명임)


아니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새로운 것이 더 반짝반짝 빛 나보이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새해를 맞이했다 하지만

책상 위에는 한입 베고 먹다

남은 단무지들이 넘쳐납니다.

읽다만 책들.

끝은커녕 중간도 보지 못한 채

흐린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영어 공부의 흔적들.

1월, 2월만 빼곡히 적힌 2015년 다이어리.

오랜만에 책 상 밑에서 꺼낸 체중계는

지난 다이어트 결심을 비웃듯이 한결같은 숫자를 가리킵니다.


또다시 새해.

인심 좋은 지인에게 2016년 다이어리를 또 받았습니다.


채워지지 않은 빈칸을 마주하고는

막막함이 앞섭니다.

매번 새로운 계획, 새로운 결심을 적으며 설레는

것도 한두 번이지.

시작점만 열심히 찍을 게 아니라

뭔가를 쌓아가야 하는 나이인데...

타들어 가는 마음을 식히려 냉수 한 잔을 찾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다 엄마의 잔소리가 떠올랐습니다.




기지배야,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나
보고 사와라!




새롭게 뭘 배워야 하나?

새로운 일을 찾아봐야 하나?

새해만 되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질문들을

곱씹다 뜨끔했습니다.


정리의 달인이신 엄마의 충고에 따라

어수선한 머릿속을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일단, 새로운 계획과 결심을 써내려 가기 전에

내 마음의 냉장고 문을 열고 들여다 보기.


이제까지 나는 무엇을 해왔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 고민 끄적끄적.


내 마음의 냉장고에 무슨

재료가 들어있나 보는 일은 쉽지 않더군요.


별 것 아닌 이런 재료로

무슨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

누군가 찾아주는식을 만들 있을까?


고민이 몰려옵니다.



냉장고 안에서 늘 보던 식재료가 시시해 보이듯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참 시답잖아 보입니다.

"그런 걸로 밥벌이나 하겠냐?'는 부모님의 말까지

더해지면 겨우 찾아낸 나의 작은 재주들은 먼지처럼 흩어지고 맙니다.


이런 마음이 들 때면

나와 비슷한 고민에 빠졌을 것 같은

그를 떠올립니다.

대단할 것 없는 물맷돌을 들고

거인 골리앗 앞에 다윗을 생각합니다.





세기의 대결, 다윗과 골리앗.

다윗에게는 투구나, 창, 방패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이름을 날리던 거인 장수 골리앗을 한방에 쓰러지죠.

말도 안 되는 이 대결에서

다윗의 한 방은 바로 물맷돌이었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다른 군인들의 비움을 살 만큼 초라해 보였지만 그는 쥐고 있던 물맷돌을 던져버리지 않았습니다.

윗은 물맷돌을 휘두르며 훈련했던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골리앗 앞으로 나갈 용기가 없었다면

그는 물맷돌을 던질 줄 아는 양치기로 남았겠죠.




다윗은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군인이 가진 칼이나 창을 부러워하기보다
자신이 가진 것에 집중했습니다.

남들은 초라하게 여길지라도
그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갈고닦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직 두 번째 새해가 남았습니다.

구정이 돌아오기 전에

냉장고 문부터 열어봐야겠네요.

엄마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까요.

한바탕 냉장고 정리를 하고 나서

내 마음의 문도 열어봐야겠습니다.


혹시 꺼내보지도 않은 채 썩어가는

나의 재료는 없는지.

썩은 부분만 잘 잘라내면

냉장고 속에서 굴러다니던 호박도

맛있는 된장국의 재료가 되듯

잘 다듬으면 쓸 만한 숨겨진 재주를

발견하는 새해가 되기를!



글. 사진 _ 이음






_ 새해, 이제는 밥알에 손을 베지 않길 바래요.

<당신, 밥알에 손을 베어보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