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정치>가 들려주는 피곤한 삶에서 탈출하기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의미를 알 듯 모를 듯한 문장.
한병철의 <심리 정치>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문장의 의미에 감탄하게 됩니다.
어쩌면 동일한 외침이 입안에 맴돌지도 모릅니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저자 한병철 님은 나를 둘러싼,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에 대해 의심하고
혼란에 빠뜨려 두고는
다시 새롭게 정리하도록 등을 떠밉니다.
별로 친절하지 않은 문장으로 말이지요.
한국인인 저자가 독일어로 써서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게다가 철학서니!
그의 문장은 분명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낯설기만 한 그의 질문과 대답을 더듬더듬거리며 따라가고 멈춰 서서 이해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다 덮어두고는
일상으로 돌아가면 문장의 의미가 하나 둘 선명해집니다.
나를 묶고, 내 삶을 참으로 피곤하게 만들었던 '철조망'이 조금씩 선명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게 됩니다.
자기계발서만 읽던 시절이 있었지요.
기업을 경영하듯 나 자신도 그렇게 잘 경영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시간, 인간관계, 건강, 습관 등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기획하고 실천해서 목적을 이루려 애쓰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매 순간 나 자신을 점검하고 관리해서
이상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내는 일은 중요했지요.
(이상적인 모습이란, 사회나 타인이 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성공적인 삶을 위해 당연한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피곤한 삶이었는지!
"자본주의의 변이체인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를 경영자로 만든다....
오늘날 모두가
자기 자신의 기업에 고용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모두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나를 착취하는 경영자이자 노동자라면,
나는 언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신자유주의는 모두에게 자유를 허용한 듯 하지만
무한 경쟁에서의 자유는 '착취'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경영자)이 되는 삶이
피곤할 뿐 아니라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 저자는 반복해서 얘기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성과 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적 질서 속에서
사람들의 공격성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
우울증과 소진증후군(탈진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탈진할 만큼 애쓰며 살았지만 그런 노력의 결과가 실패라면 그것은 네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거나 네가 능력 없는 탓이라고 내가 나 자신을 비난하니 더 괴로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물든 내 생각이 악덕 경영주처럼 나를 쉴 새 없이 경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오싹해집니다.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목표입니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열심히 자신을 채찍질하는 이유 또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겠지요.
나의 목표라 생각하며 달려가던 곳,
그곳이 정말 내가 원하는 곳일까요?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서 일한다.
자본에서 생성되는 자본의 고유한 욕구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라고 착각한다."
연예인이 입은 옷을 사고 싶고
티브이 프로그램에 나온 맛집에 가고 싶고
광고에 나온 자동차를 사고 싶고
드라마에 나온 집을 사고 싶어 하는 마음.
그것은 진짜 내가 원하는 마음일까요?
혹시 대중매체를 통해 학습된 욕구는 아닐까요?
나에게 주입된 욕구를 이루고 난 후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내가 원했던 진짜 행복이었을까요?
자본이 원하는 행복이 아닌,
내가 진짜 원하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sns를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대중에게
자신의 하루를 얘기합니다.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조차도.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누가 시키지 않아도
sns에 다 "고백"합니다.
"디지털 통제 사회는 고도로 자유에 의존한다.
그것은 오직 자발적인 자기 조명과 자기 노출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데이터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민들 각자의 내적 욕구에 따라 빅브라더에게 넘겨진다.
여기서 디지털 파놉티콘의 효율성이 있다."
(* 빅브라더란 정보 독점으로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체제를 비유하는 말이며
파놉티콘은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원형감옥을 말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던 비밀, 낯섦, 이질성이 제거되고 소통은 매끄럽고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더 나아가 커뮤니케이션의 방해가 되는 인간의 내면조차도 결국 제거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경고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고백"으로 이루어진 투명성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빅데이터는 인간 행동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미래는 계산하고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인간 자체가 긍정화되어 양화하고
측정하고 조종할 수 있는 사물이 된다."
sns에서의 "고백"이
어느새 투명한 인간을 만들고,
그렇게 생활과 생각이 다 들여다보이는 인간은
지배받기 쉬운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얘기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던 시대를 거친
우리나라이기에 소통이 더욱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sns를 통해 모든 다 말할 수 있는
소통의 문화에 더욱 열광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을 인격이 아닌 하나의 데이터로 인식하는 빅데이터의 시대가 도래하면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던 소통과 투명성은
양날의 검이 되어 우리를 찌를지도 모릅니다.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접근했을 때 아이들은 긴장합니다.하지만 친절하게 웃으며, 사탕까지 내미는 아저씨가 다가오면 아이들은 경계심을 풀기 마련이지요.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을
이렇게 미소를 지으며 사탕까지 들고 오는
스마트한 권력이라고 지칭합니다.
"스마트 권력"은 친절하게 웃으며, 너의 모든 자유를 허용한다는 사탕 같은 달콤한 제안까지 합니다.
이전의 권력이 '폭력'을 휘두르며 목적을 이루었기에 너그러운 몸짓으로 모든 것을 허용하며 다가오는 '스마트 권력'은
그야말로 매력적입니다.
"신자유주의적 권력 기술의 목표는
인간을 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안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금지 대신 유혹한다. "
누군가 나에게 친절한 표정으로
"너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어"하며 긍정의 힘을 불어넣고,"무엇이든 다 들어줄 테니 얘기해봐" 하며 친절한 눈빛을 보낸다면,
그에게 곧 호감을 갖게 되겠지요.
그렇게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을 자주 만나다 보면 어느새 그에게 의지할지도 모릅니다.
(저, 쉬운 여자는 아닙니다만 -.-;)
자본주의의 돈이 그랬듯이,
신자유주의의 자유도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돈과 자유를 좋아하다 못해 의존하게 된 인간은 결국 쉴 새 없이 노동하는 '노예'의 삶이 된다고 저자는 경고합니다.
이쯤에서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가 아닌,
그럼 진짜 자유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봅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무한대의 허용이 주어졌을 때
정말 행복할까요?
제한이 있는 상태에서의 자유와
제한이 없는 상태에서의 자유,
무엇이 더 행복할까요?
저자는 자유에 대해
뜻밖의 힌트를 던져줍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들 곁에 있음을 의미한다.
인도 게르만어에서 자유와 친구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자유를 간절히 원했던 20대.
자유롭고 싶어 가족을 떠나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여행을 떠나 보기도 했지만
내가 정말 자유롭다 느낀 시간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였습니다.
여기저기 깨져 날카로운 모습이라도
묵묵히 받아주는 그의 곁에서
나는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습니다.
사랑과 자유가 동일한 감정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한병철의 <심리 정치>에 대해
아직 할 말도, 질문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146페이지뿐인 이 책을 한 달 넘게
붙들고 놓아주질 않네요.
책을 펼칠 때마다
나를 묶고, 내 삶을
피곤하게 하던 '그 무엇'을
하나 둘 벗어가는 시간 때문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