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길 따라 이어지는 산책코스와 신선한 커피 한잔
샌프란시스코는 자연을 품고 있는 도시다. 3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만 지형을 따라 다양한 하이킹 코스가 곳곳에 숨어있다. 언덕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구불구불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집들이 평평하게 대지를 덮고 있고 그 사이 빈틈에는 산책로와 공원들이 있어 도시의 경관을 보다 친근하게 만든다.
나는 주로 해안가에 있는 산책로를 걷는데, 그곳엔 바다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로 가득 찬 바람과 간간이 섞여 나는 딜 향으로 폐가 가득 차 산에서 하는 산림욕처럼 '해안욕'을 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친구 프리티가 알려준 '모리 포인트'는 해안욕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태평양을 서쪽으로 낀 해안 산책로를 남편에게도 소개하며 우리는 손을 잡고 언덕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날씨가 좋은 탓에 가족 단위의 하이커들이 좁은 오솔길을 촘촘히 수놓고 있었다. 일렬로 줄을 서 행진하듯 우리는 가족들 그룹을 따라 바다를 보며 걷고 또 걸었다. 절벽에는 초여름의 야생화들이 반짝 거리는 얼굴들을 내밀며 해를 쬐고 있었다. 날개 끝에 빨간 점이 찍혀있는 어느 작은 새는 둥지를 지키려 했는지 자신보다 10배나 몸집이 큰 까마귀에게 위협을 가하며 짹짹거렸다. 일초에 60번의 날갯짓을 한다는 벌새도 꽃에서 꿀을 따먹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고,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탁 트인 곳에서 산책을 하면 나 역시도 자연의 일부가 되는 기분이다. 지구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땅 위에 서 있는 생명체인 우리 역시 둥지를 지키기 위해, 먹기 위해 일하며, 숨 쉬고, 살아가니까.
걸음이 빠른 나와 남편은, 앞서 있던 가족들과 친구들 무리를 제치고 가장 높은 언덕을 올랐다. 높은 곳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는 것은 일종의 성취감을 주지만 때론 무엇을 위해 올라왔나 하는 생각을 들게도 만든다. 한국에서 등산이 취미였던 나는 산 봉우리를 오르면서 평소에 머릿속을 채우던 잡생각을 떨쳐 버리고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경험으로 몸과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를 채웠었다. 하지만 산을 올랐을 때의 성취감과 기쁨은 잠시뿐, 산 아래서 위엄 있고 웅장한 산의 모습을 보았을 때 느끼는 아름다움 역시 산을 찾는 큰 이유 중의 하나라는 걸 세월이 지나가며 느끼는 것 같다. 모리 포인트의 정상에서 연세 지긋하신 두 할아버지를 만났다. 어느 길로 내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계시는 모습이었다. 나와 남편은 호기롭게 가파른 길을 선택했다. 경사진 비탈길에 자갈이 또르르 굴러다녀 꽤 미끄러웠지만 아직까진 쓸만한 무릎 연골들이 버텨주어 어렵게 평평한 곳에 도착했다. 다 내려와 언덕 위를 돌아보니 할아버지 두 분도 지팡이를 짚은 채 내려오고 계셨다. 이건, 할아버지들이 오실 수 있는 길은 아닌데, 나와 남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역시 연륜으로 자신의 몸 컨디션과 내리막의 상태를 알아보셨는지 두 분은 이내 포기하고 다시 언덕을 올라갔다. 다행이란 생각에 언덕에서 눈을 거두고 주차된 차를 향해 힘차게 걸었다.
산책으로 나들이를 마무리하기엔 아쉬워 주변의 커피숍을 검색했다. 구글 지도에서 현재 위치를 중심으로 반경 4km 지점까지의 커피숍 중 평점이 제일 높은 가게를 찍었다. 평점 4.8인 크래프츠맨 커피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창고 안에 하얀색 트럭을 넣어두고, 그곳에서 커피를 만들어 파는 신선한 콘셉트의 커피숍이었다. 나는 차이라테, 남편은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카페주인인 듯 보이는 남자는 친절하고 힙하지만 낯을 가리는 느낌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찾아보기 힘든 백인 내향인이라니. 내향인 남편을 둔 덕에 그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가구들과 초록초록한 식물들로 채워진 커피숍은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듯 소박하고 심플했다. 음료도 맛있었다. 구글 평점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음료와 가게의 분위기가 증명했다. 프랜차이즈 가게 보다, 주인장의 취향이 드러나는 이런 카페에 왠지 나는 더 끌린다. 커피를 마시는 사이, 아빠와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 하나가 카페로 들어왔다. 둘은 막 하와이에서 온 듯한 느낌이었다. 두 부자는 일본인처럼 보였는데, 까무잡잡한 피부색이 하나의 물감 튜브에서 짜낸 듯, 똑같은 톤이었다. 아이는 익숙한 모습으로 가게입구 쪽 노란 게임기 앞에 섰다. 아빠는 게임기에 동전 몇 개를 넣어주고선 친숙한 듯 카슨의 이름을 부르며 주먹을 부딪히는 인사를 했다. 주인장 이름이 '카슨'이구나. 한 가게의 단골이 되어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익명성이 강조되는 사회에 익숙했었다는 사실을 해안가의 작은 카페에서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개 이름을 소개해준 할아버지가 떠나고, 우리도 카페를 나섰다. 특별할 일 없는 산책과 커피였지만 따듯한 오후의 햇살을 즐기기엔 충분했다. 별일 없이 지나가는 평범한 하루에 감사하며 잔잔한 마음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