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여행기

개고생 없는 추억은 없기에…

by 한양희

힝구와 함께하는 세 번째 미국 도시 여행지는 시애틀이다.


휴스턴에서 4시간 4분의 비행 끝에 시애틀에 도착한우리는 우버를 타고 시내에 있는 힐튼 가든인에 도착했다. 로비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 30분. 그곳엔 전혀 직원 같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흑인 아저씨가 검정색 후드를 쓰고 앉아 있었다. 험상궂은 인상이었지만 꽤나 친절하게 체크인을 도와준 아저씨는 우리 방을 4층에 배정해 주었다. 다른 건물들로 뷰가 가려진 4층의 호텔방 안에는 물도 슬리퍼도 없었다. 힐튼 다이아몬드 멤버인 힝구는 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저씨의 포스가 너무 무서워서 그냥 이방에 있자고 했다. 이집트에서 한 시간 동안 4번 방을 바꾼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ㅋㅋㅋㅋ) 배가 고파 잠시 피자를 사러 나갔다 오면서 다시 마주한 아저씨에게 슬리퍼를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슬리퍼 두 개를 주며 잘 자라고 했다. 꽤나 서윗한 아저씨의 말에 우리는 용기를 내어 물을 하나 살 테니 방으로 청구해 달라 했다. 아저씨는 여기 공짜 물이 있으니 가져가라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이럴 거면 머리에 쓰고 있는 검정색 후드라도 벗고 있던지. 아저씨의 강도 같은 옷차림과 무서운 외모 때문에 쫄보인 우리는 잔뜩 움츠렸지만 ‘참 좋은 아저씨야’라고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튿날부터 시작된 본격 시애틀 여행은 파이크 마켓 근처에 있는 비스킷 비치(bitch)에서의 아침 식사로 문을 열었다. 비스킷이라 불리는 두껍고 단단한 빵 위에 고기소스를 뿌려 빵을 촉촉하게 만들고 그 위에 토핑을 달리해 파는 남부식 음식이었다. 이곳의 주문과 계산은 QR코드를 스캔해서 할 수 있는데, 우리보다 한 참 먼저 와서 기다리던 할아버지는 기다리는 모든 이들이 음식을 받고 나서야 온라인으로 주문을 해야 하는 걸 알았다. 나이가 들고 디지 털 문맹이 되는 세대의 설움과 빡침을 느꼈다. 나도 늙으면 테크놀로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봐 미리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뒤늦게 주문을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내가 나이가 들면 생기게 될지도 모르는 여유를 그 할아버지는 갖고 있었나 보다.


길가에서 비둘기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시장구경을 했다. 시장에는 생선과 과일, 꽃들을 팔고 있었고 지역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선보였다. 다른 것보다 눈에 띈 건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물건을 구경하는 꼬마와 흐뭇한 표정으로 어린이를 바라보는 반대편 좌판의 아저씨. 엄마가 집어 든 예쁜 꽃다발을 만지려 유모차에서 작은 손을 뻗어대는 쌍둥이 남매. 절름거리는 다리로 갈매기들 사이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작은 새에게 빵부스러기를 던져주고 사진을 찍는 아가씨. 모든 장면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리게 보였다. 바닷 공기가 신선했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1971년 처음, 문을 연 세계적 커피체인 스타벅스 1호점을 뒤로한 채, 커피 로스팅 공정을 볼 수 있는 리저브드 매장을 들렀다. 카페 내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먼지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햇살이 가득 차 있었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초콜렛으로 만들었다고 매니저가 자랑한 뱅오 쇼콜라와 아몬드 크로와상과 함께 크리스마스 블렌드를 마셨다.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다 모인 듯 다양한 언어가 들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서로 다른 말들과 다른 생김새의 사람들이 익숙한 공간에 모여 커피를 마셨다. 인류가 하나가 된 듯 평화로웠다.



스타벅스를 나와 십오 분 정도를 걸어 시애틀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단풍이 물든 공원에 앉아 햇살을 맞았다. 힝구에게 사랑한다고, 이곳에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커다란 나무가 노랑, 주황색 잎을 흔들며 우리를 내려다봤다. 도서관은 10층으로 엄청난 양서들이 가득 차 있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도시 전경을 조망할 수 있게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호크니의 그림책을 보며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또 한 번 힝구에게 사랑 고백을 했다. 힝구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성이라고 했다.


늦은 점심으로 딘타이펑에 갔다. 도시에서나 먹을 수 있는 체인점일 듯해서 여행 전부터 와야 할 곳으로 꼽았다. 동양의 맛이 그리웠다. 샤오롱 바오와, 오이샐러드, 새우 볶음밥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호텔로 돌아와 글을 쓰는 지금 두툼하게 부푼 배를 보며 내가 양보한 샤오롱 바오 한 알을 더 먹지 않는 힝구를 또 한 번 째려보게 된다.


시애틀에 오면 꼭 봐야 하는 스페이스 니들까지 산책을 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꽤나 비싼 입장료를 내야 해서 주변공원을 둘러보자고 힝구에게 말했다. 뻔한 도시 전망을 보는데 힝구가 번 돈을 쓰고 싶진 않았다. 돈을 벌지 않게 되니 돈 쓰는데 더 조심스럽다. 물론 내가 돈을 번다해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는데 36달러를 쓰진 않을 거지만 말이다. 다시 시내로 돌아오는 길엔 모노레일을 탔다. 다양한 운송 수단을 운영하는 세련된 도시의 모습 속에 내가 담겨 있는 듯해서 재미있었다.


위도가 높은 시애틀은 해가 빨리 저문다. 네 시 반이 되자 컴컴해진 하늘 아래 크리스마스 전등을 든 나무들이 길을 빛내고 있었다. 잠시 들러 목티를 유니클로에서 바코드 스캔을 하지도 않았는데 가격이 뜨는 최첨단 결재시스템에 놀라고 새삼 아마존의 본사가 괜히 시애틀에 있는 게 아니구나 감탄했다.

다시 찾은 파이크 마켓은 낮 동안 메웠던 관광객들은 물러나고 장사를 접는 상인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피로시키 피로시키에서 빵 하나를 사 바다가 보이는 데크에 앉았다. 따뜻한 빵을 먹으며 보는 야경이 나쁘지 않았다.


“미국 도시는 다 비슷한가 봐. 하루면 다 보잖아?”

“역사가 짧아서 그런 것 같아. 유럽은 볼 게 너무 많잖아. 어서 유럽에 가자.”

촌스럽게 빛나는 대관람차를 바라보며 힝구와 유럽에 갈 생각에 설레었다.


15분을 걸어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거리에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바로 향했다.

“술을 먹지 않으면 저녁에 할 게 없어. 술을 먹으면 친구들끼리 모여서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해도 재미있거든. 군대 친구들 만나서도 맨날 모이면 같은 이야기를 한다구.”

“술을 먹는 게 아니라 추억을 먹는 거잖아. 원래 추억이란 건 같이 한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인 거야. 그래서 우린 지금 추억을 만들어야 해. 그래야 나중에 얘기할 거리가 생기지.”

“하지만 우린 추억이 없는 것 같아.”

“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은 개고생을 해야 만들어지기 때문이야.”


개고생은 나중으로 남겨 두고 우리는 손을 잡고 호텔에 도착했다. 은은한 조명과 깨끗한 침구 위에서 글을 쓰는 지금은 너무 평화롭다. 즐겁고 평화로운 여행이라 기억에 남지 않을까 봐 꼼꼼히 글로 적어둔다. 나중에 펼쳐 읽어보고 서로 이야기하면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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