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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Apr 11. 2023

36세 새댁 둘의 샌프란시스코 여행기 3탄

서로 다른 우리는 같은 도시에 머무르는 사람들

우리가 머무는 곳은 샌프란시스코 유니온 스퀘어의 더 웨스틴 호텔.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호텔이다. 나와 아현, 새댁 둘은 샌프란시스코의 세 번째 날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채비를 마치고 호텔 로비의 카페에 앉아 크로와상을 뜯어 라테에 찍어 먹었다. 버터향 가득한 빵의 뻥뻥 뚫린 공기층 사이사이에 우유와 커피가 스며들어 부드럽고 풍성한 감촉을 입 안 가득 채웠다. 도시에 오니 맛있는 빵과 커피가 있어 너무 행복했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비즈니스를 위해 호텔에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정장을 차려입고 노트북이나 서류가방을 든 사람들이 우리가 앉은 로비의 카페를 오갔다. 이런 도시에서 일하면 어떨까? 상상하고 있는 찰나에 비니 모자를 쓴 푸석한 머릿결의 금발 백인 아줌마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너네 어느 나라에서 왔니?”

“한국이요.”

“응. 어쩐지 그런 것 같더라. 내가 한국에 다녀와 봐서 한국말을 구분할 수 있지.”

뽐내는 투로 이야기하는 아줌마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어제가 생일이어서 샌프란시스코에 왔으며, 자신은 거의 50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크루즈를 타고 이곳에 하루, 저곳에 이틀씩 머무는 코스였다. 나는 지금 60세인데 사람들은 그것 보다 나를 어리게 본다. 등이 요지였다. 아현이와 내가 몇 번 맞장구 쳐주자 아줌마는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사실 너희 나라는 인종차별적인 나라야. 너네도 알고 있지?”

아침부터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 갑작스러운 인종차별 어택에 잠시 당황. 아줌마의 말인 즉, 크루즈 여행 중 이틀을 정박한 서울에서 자신을 포함한 백인 세 명과 흑인 한 명이 같이 택시를 타려고 했더니 택시가 멈추지 않고 그냥 가더란다. 그래서 흑인을 저쪽에 숨기고 백인들만 있으니 택시를 잡을 수 있었고, 숨어 있던 흑인을 불러 목적지에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가 대학에서 일하고 있고, 개도국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잘 알고 있는데, 한국에서 피부색이 까맣다고 택시를 안태우거나 차별하는 경우는 아직까지 듣거나 경험한 적이 없어요. 그런 경험을 하셨다니 참 이상하네요.”

그 아줌마는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을 드러낸 줄 모르나 보다. 한국에서 바쁜 택시들이 서지 않은 이유를 ‘흑인’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숨겼다는 것 자체가 아줌마가 가지고 있는 인종에 대한 차별을 방증하는 것이니 말이다.

많은 곳에 가봤다고 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도 20개국 가까이 여행하면서 다양한 장소에 가보는 것이 견문을 넓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아줌마를 보며 닫힌 눈과 닫힌 마음으로는 새로움을 수용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아침이었다.


일찍이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으로 나서려던 계획이 자랑쟁이 아줌마의 뜬금없는 방해로 조금 미뤄졌지만 가장 먼저 만난 마티스의 작품으로 이전의 혼란스럽던 마음이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잠재워졌다. 마음의 풍요를 채울 수 있는 작품들 사이를 거닐며 만보를 걸었다. 1900년대 이후 현대 미술로 오면서 작가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해석하는데 점점 지쳐가던 우리는 5층에서 특별전시를 하던 조안 브라운의 작품들을 만났다. 샌프란시스코 출신으로 화가가 성장하며 계속해서 바뀌는 표현방법과 회화의 주제가 재미있는 전시였다. 동물을 좋아하던 청소년기에는 동물이 주요 대상이었다면, 이후 수영에 심취해 수영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가 하는 한편, 3번의 이혼으로 계속 바뀌는 남편과, 여행, 춤에 대해 그리다 이후에는 색채만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끊임없는 변화의 기로에 선 예술가였다. 그녀의 삶과 관심사가 그림에 묻어져 나왔다. 그림을 마주하고 있으니 예술가와 직접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작품과의 대화가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걸 실로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누구에겐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자신에게 충실하고 자기애가 넘치는 작가의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3시간 이상의 미술관 투어는 우리를 지치게 하기 충분했고, 더 걷기 위해서는 칼로리가 필요했다. 아현이의 추천으로 처음 먹어본 슈퍼두퍼버거는 미국 햄버거 특유의 리치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섬유소가 골고루 갖춰진 엄청난 칼로리를 몸에 넣고서 우리가 계속 향한 곳은 차이나타운.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은 미국에서 가장 먼저 생긴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라고 했다. 관광객이 없는 탓에 크게 구경할 것이 없는 동네였지만 나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서점! 각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그 도시의 가장 오래된 서점이나, 헌책방, 유명한 서점을 꼭 들르는 나에게 눈에 띄는 서점이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지하와 1, 2층으로 구성된 city light bookstore에서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메가서점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점원들이 추천하는 책 섹션에는 한국 작가가 쓴 책이 3권이나 있었고, 그중 2권인 ‘파친코’와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미 한국어로 읽어 본 책들이라 더욱 반가웠다. 나와 아현이는 각자 책을 골랐고, 베트남 작가가 쓴 Sympathizer를 동시에 골라 서로에게 선물했다. 길 잃은 영혼들을 위한 마음과 지성의 양식을 제공하는 도시의 등대라는 서점의 이름이 너무 멋지고 낭만적이다.


책을 들고 나와 거리를 거닐며, 여러 호텔들도 중간중간 방문했다. 호텔지배인인 아현이의 커리어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샌프란시스코의 고풍스러운 호텔들을 방문하며 각 호텔 브랜드의 서로 다른 테마와 타깃 고객들을 비교해 볼 수 있었는데, 호텔 소비자로서 나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루의 일정을 거의 마무리 짓고 호텔로 돌아와 호텔에서 주는 쿠폰과 물병을 받으러 컨시어지에 들렀다. 친절한 직원분이 우리에게 어떤 하루를 보냈냐고 물었고, 우리는 너무 신나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같은 책을 사서 보면, 레즈비언 같아요?”

빨간색 책 표지가 강렬한 책을 같이 들고 다니는 우리에게 다가온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에 의문이 생겨, 그 친절한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하하하, 아니요. 누가 그래요?”

누군가 그런 눈빛을 보냈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친한 친구인데, 같이 책을 읽고 서로 책에 대해이야기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여행을 와서도 현지인처럼 지내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노트북을 챙겨 온 우리는, 각자의 랩탑을 가지고 호텔을 나와 다시 카페를 향해 밤거리를 나섰다. 15분 정도 거리의 동네 카페에 앉아,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스케치하듯 옮겨 써보았다. 짧은 시간도 이곳에 있는 동안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반영해서 말이다.


다시 호텔로 돌아왔을 때, 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아현이가 전화를 받고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한테 지금 아침을 주겠데.”

아침을 어떻게 준단 말인가? 바나나라도 가져다준다는 건가? 왜? 누가? 이유 없는 호의에 의심부터 생기는 내 마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호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까 전 만난 컨시어지의 아저씨가 서있었다.

“이건 조식 쿠폰인데, 머무는 동안 쓰세요.”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주시는 거죠?”

“왜라니요. 마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갑작스러운 공짜 아침식사에 우리 둘의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았다.


“이게 웬일이야? 도대체 왜 주는 거래?”

“몰라. 하하하. 뭐야. 왜야? 너무 좋아.”

깔깔 웃으며 난데없이 찾아온 행운을 마음껏 기뻐했다.

인종차별주의자를 만난 아침과 이유없이 친절을 베풀어준 제라마야를 만난 저녁이 공존하는 하루 였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의 3일 차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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