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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Mar 14. 2023

36세 새댁 둘의 샌프란시스코 여행기 2탄

새로운 자극은 언제나 즐겁다

일어나 보니 아직 밖은 어두웠다. 해가 뜬 이후인데도, 구름이 끼고 날씨가 우중충 해서 어두침침했다. 아현이는 옆 침대에서 아직 꿈속 여행 중인가 보다. 백수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요즘이라 나의 기상시간은 9시 언저리지만, 여행을 하는 순간만큼은 생생하고 부지런한 본연의 내가 깨어난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같이 도시에서는 숙박, 음식 등 모든 재화가 비싸서인지 머무르는 동안의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겨우 눈을 뜬 아현이는 시차 때문에 새벽에 깼다가 다시 잠들었다고 한다. 얼굴에 피로감이 잔뜩 묻어있었다. 퉁퉁 부어 반쯤 감긴 눈이 귀여웠다.


호텔은 Destination Fee라는 명목으로 우리에게 25달러를 추가로 청구했다, 그 대신 호텔의 식당에서 25달러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단다. 처음엔 쓰고 싶지 않은 비용을 청구한 호텔의 정책에 불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체크인을 하면서 Destination Fee를 한 명 당 25$를 내야 한다고 잘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둘이 합쳐 하루에 50$면 날강도 수준 아닌가. 게다가 나는 여비를 힝구에게 지원받아야 하는 백수의 입장인지라 예상치 못한 지출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아침에 카운터에 가서 다시 물어보니 추가 비용은 투숙객마다가 아닌 방마다 부과되는 비용이란다. 낼 돈이 줄어들어 심리적 부담이 줄어드니 빵맛이 배가 되었다. 백수는 작은 돈에도 괴로워하다 금세 기뻐한다. Destination Fee 덕분에 미국인생 최고의 크루아상과 라테를 매일 아침으로 먹을 수 있었다.


힝구가 호텔에 왔다. 오늘은 힝구와 함께 하는 마지막 일정이다. 이틀간 빌린 렌터카의 뽕을 뽑기 위해 우리는 Big Sur로 향했다. 캘리포니아 1번 국도를 달리며, 태평양을 오른쪽에 두고 달리는 해안도로 드라이브가 여행의 주요 목적이었다. 뻥 뚫린 해안도로를 달리며 아현이가 서울에서 받던 스트레스를 훌훌 날려 버리길 바랐다. 왕복 6시간의 여정. 끝없이 펼쳐지는 길 위에서 먼바다를 바라보면 나를 둘러싼 괴로움과 걱정은 티끌만 한 존재가 되어 잠시 내 곁을 떠난다. 출발 후 오래지 않아, 아현이에게 카톡이 왔다. 고등학교 후배 대균이가 자신도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있다며 휴일인 오늘 만나서 커피나 마시자는 연락이다.

“오랜만에 해외에서 후배도 보고 좋겠다. 같이 가자. 이따 스탠퍼드로 오라고 그래.”

오늘 일정의 마지막 목적지에서 아현이의 친구를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브런치를 먹기 위해 베이글 맛집에 들렀다. 지난번 힝구와 Big Sur로 갈 때 찾아낸 보물 같은 카페였다.

 

“너랑 계속 있으니깐. 미국 같지 않아.” 아현이가 말했다.

“그치? 여긴 문화차이도 크게 없고, 우리가 계속 한국말해서 그렇잖아. 미국체험하게 주문해 봐.”

카운터에는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새 하얗고 예쁜 아가씨가 엄청 빠른 속도로 말하며 주문을 받고 있었다. 우리가 그의 앞에 섰을 때도 환하게 웃으며 쏼라쏼라 했다. 친절했지만 의사소통에 부정확성이 돋보이는 예쁜 그녀는 3개의 베이글을 주문한 우리의 주문서를 1개로 찍었다.

“Three please.(세 개 주세요.)”

주문을 정정한 후, 제대로 주문이 들어간 것인지 조금은 불안했지만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간 못했던 대화를 나누느라 음식을 잠시 잊고 있었다. 얼마 후 베이글이 나왔다. 우리가 주문한 베이컨 달걀 베이글 말고, 연어 베이글 3개가 말이다.


“뭐야 이거? 이거 연언데? 이거 먹을 거야?”

아현이랑 힝구는 잘못 나온 베이글을 그냥 먹는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주문한 것도 아닌 데다 날 것을 먹지 못하는 탓에 원래 주문했던 베이글로 바꿔달라고 했다. 자신들이 주문을 잘못 받은 것이니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아닌가. 당연히 다른 점원도 내 베이글을 다시 만들어 준다고 했다.


힝구는 “그래도 돼? 바꿔 주는 거야?” 하면서 우물우물 베이글을 먹었고, 아현이는 “나 연어 좋아해.”하며 냠냠 베이글을 먹었다. 먹는 것이 곳 내가 된다는 평소 신념에 따라 아침에 날 것보다는 토마토, 시금치, 달걀처럼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 골고루 영양소를 섭취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원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짜증이 밀려왔다. 특히 힝구가 “이 베이글은 지난번 먹은 것보다 맛이 없어.”라고 해서 더 속이 상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아현이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별거 아닌 건가? 그냥 잘 못 나온 거 먹으면 되는데 과민반응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계획이 어긋 났을 때 스트레스를 받는 나는 ENFJ였다. 아현이 MBTI 결과가 나랑

같다고 하던데, 우리의 반응은 너무 달랐다. 쿨한 척하고 싶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진 탓에 감정의 사회적 표현이 서툴러졌는지 나는 조금 뾰루퉁 해져 있었다. 힝구와 아현이 베이글을 다 먹어갈 무렵, 새로 만들어진 나의 베이글이 나왔고, 그마저도 예전에 먹었던 그 맛이 아니라 실망했다. 보물 같은 카페리스트에서 한 가게가 삭제되고 말았다. 먼 길 온 친구에게 맛난 베이글을 먹여주고 싶었는데 실망만 안겨줘 두고두고 속이 상하다. 또 별거아닌 베이글에 날선 모습을 보여 미안했다.

지난번에 먹었을땐 인생 베이글이었는데…


배를 채우고 나서는 길은 내내 하늘이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 나름 운치있는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었다. 중간중간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 내려 사진을 찍고 다시 길을 나섰고 반환점으로 설정한 Bixby 다리에서 사진 한 방을 박았다. 힝구는 멋진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이리저리 위치를 바꿔가며 사진을 연신 찍어댔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은 한 장도 건질 수 없었다. 하지만 다리만큼은 너무 멋졌다.

돌아오는 길에는 힝구가 피곤해하는 탓에 내가 운전석에 앉고 아현이 조수석에 앉았다. 뒷자리에서 쿨쿨 자는 힝구를 뒤로 한 채 우리는 우리만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갔다. 최근 동성커플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인정 판결을 담당했던 변호사 친구, 꿈을 좇아 해외로 나가거나 학위를 이어가는 주변 친구들, 우리가 앞으로 써 내려갈 글의 주제와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이야기했다. 잠시 멈춰 있었던 내가 알지 못하던 사이, 주변 사람들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성장하고 노력하는 있었다. 오랜만에 힝구 아닌 다른 사람과 깊은 이야기를 하니 기분 좋은 자극제가 되어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이래서 사람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며 교류하고 소통해야 하나보다. 뭔가를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으로 혼자 박혀 있었던 지난 4개월간의 미국에서의 시간을 반성했다.


돌아오는 길에 예쁜 카페와 갤러리가 많다는 ‘카멜 바이 더 씨’에 들렀다. 도시 이름이 ‘바닷가 옆 카멜’이라니 이름부터가 아기자기하고 낭만적이다. 소문처럼 예쁜 상점과 화랑들이 많이 있어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다녔지만, 딱히 사고 싶은 물건은 없었다. 현명한 소비자로서 필요 없는 지출에 인색한 모습이 서로 닮아있는 여행 동지들이었다.


해안의 멋진 풍경을 뒤로한 채 우리 일행은 스탠퍼드로 향했다. 스탠퍼드에서는 아침에 막 연락이 닿은 아현이의 친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균이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회사를 다니며 근처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그 결혼식을 아현이가 전에 다니던 호텔에서 하며 아현이가 여러모로 도움을 주면서 그 사이가 더 돈독해졌다고 한다.


사실 스탠퍼드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지옥의 문을 감상하는 것이었고, 아현이는 스탠퍼드 후드티를 사고 싶어 했다. 예술과, 학벌에 대한 우리의 갈증이 조금은 묻어있는 방문이었다. 스탠퍼드에 도착한 시간이 늦고, 비도 오는 탓에 오래 조각품을 감상할 순 없었지만 아현이는 원하던 후드티를 살 수 있었다. 짙은 붉은빛의 티셔츠가 대학생 새내기처럼 아현이에게 잘 어울렸다.


짧은 스탠퍼드 방문을 마치고, 대균이 까지 합세해 4명으로 늘어난 일행은 학교 앞 미얀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좋은 회사를 다니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러 비행기까지 타고 왔다 갔다 하길 여러 번, 결국 원하는 곳에서 일을 하며 명문대학에서 MBA도 하고 있다는 대균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탄했다.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멋져 보임과 동시에 우리가 너무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실천하며 일 분 일 초를 쪼개서 바쁘게 살아가는데, 나는 이 많은 시간을 그저 흘러 보내고만 있다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활동이 화폐가치로 전환되지 않는 이상 나의 몸부림이 의미 없는 쓰레기 생산에 머무르진 않을까. 두려움마저 감돈다.


그간 나 혼자 밖에 없었던 생활 속에서 아현이의 방문은 친한 친구를 만난 반가움 이상의 자극을 주었다. 한 때는 일에 치여 번 아웃이 왔다고 하지만, 치열하게 산만큼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세상 어디에 가서도 일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얻은 아현 아닌가? 물론 내가 지난 4개월간 미국에서 지내온 것처럼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내면을 채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제 역할을 부여받지 못하거나 그에 따른 효용감이 약해지면 자존감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결국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 아니던가.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표준적인 교육을 받아오며, 직업인으로서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나를 맞추는 작업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그곳에서 멀어져 간다는 게 아직 두렵다. 두려움의 이유가 진정한 나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의 가치는 직업으로써도 어느 정도는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인 건지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힝구를 보내고 또다시 아현과 남은 밤을 보낸다. 앞으로 5일 간 떨어져 있을 힝구가 조금 걱정됐지만 어른이니 만들어 놓은 반찬들을 잘 챙겨 도시락을 잘 쌀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마음을 달래 본다. 한편으론 힝구와 떨어져 잊었던 나를 찾는 시간 같아 설레기도 했다. 평소 하지 않던 침대 위에서의 독서를 해본다. 이슬아의 ‘가녀장의 시대’를 읽었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줄타기하는 사랑스러운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번 여행 동안 이 책을 다 읽고서 나도 이런 소설을 써봐야겠다고 스쳐가듯 다짐해 본다. 은은한 조명이 빛나는 호텔에서의 밤은 게으른 나에게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마법 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하루 동안 작은 머리에 들어온 많은 생각과 많은 감각들을 소화하기엔 밤이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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