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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Mar 09. 2023

36세 새댁 둘의 샌프란시스코 여행기 1탄

우리는 만나고 말았다

‘카톡, 내일이면 있으면 우리 만난다, 찐아.’


카톡이 왔지만 실감 나진 않았다. 아직 그녀를 만날 ‘내일’이 오기 전이기 때문일까? 그보다도 아현이가 무사히 비행기를 탔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아현이가 타고 오는 비행기 좌석이 “Stand by”이기 때문이다. Stand by는 그야말로 대기석이다. 항공기가 이륙하기 전 자리가 남을 경우, 직원에 대한 복지의 일환으로 빈자리에 저렴한 가격을 지불하고 오를 수 있는 자리다. 항공사에 다니는 힝구가 자리를 마련해 줘서 아현이는 값싼 티켓을 받았지만, 그 티켓에는 좌석 위치가 쓰여있지 않았다.

2023년 2월 27일. 인천에서 샌프란으로 향하는 비행기 이륙 1시간 전. 좌석은 15개가 남았고, 아현이는 대기자 명단에 16번째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좌석을 받을 수 있을까. 쫄깃하게 긴장한 마음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휴스턴시간으로 새벽 2시 14분. 35K라는 좌석이 찍힌 비행기 티켓이 카톡으로 왔다. 아현이가 오는 거다. 내일. 진짜.


힝구와 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새벽비행기를 탔다. 아현이보다 샌프란에 먼저 도착해 렌터카를 빌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입국층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아현이를 본 적 없는 힝구는 입국장에 들어오는 어떤 사람이 내 친구일까 계속 추측하며 화면에 비친 얼굴들을 보며 물었다.

“저 사람이 아현이아?”

“아니, 저 사람은 한국사람 아니잖아.”

“아, 맞네.”

힝구도 조금은 긴장을 했나 보다.


아현이는 나의 대학친구다. 지방 출신인 우리 둘은 학교 기숙사 ‘한우리집’에서 만났다. 기숙사 신체검사를 같이 하며 알게 된 ‘명규’가 본인의 룸메이트인 아현이를 소개해줬고, 그렇게 우리는 첫인사를 나눴다. 아현이와는 과도 달라 딱히 친해질 이유도 없었는데, 우리는 어째서인지 서로를 알아봤다. 우리를 이어준 명규가 너무 고맙다.

 

드디어 저기서 빨간 가방을 든 아현이가 나왔다. 힝구도 단번에 알아봤다. 쟤가 내 친구인 걸.

“아현아.”

“은진아.”

한달음에 달려가 아현이를 꼬옥 안았다. 반가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긴 비행에 지치고, 내 눈물에 당황한 아현이는 나를 살며시 안아줬다.

“네가 미국에 오다니. 대박이야. 우리 힝구야. 인사해.”


친구의 미국 입성을 환영하듯,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신선했다. 아현이가 피곤할 거라 생각했지만 곧 그녀에게 찾아올 시차를 이겨내기 위해 우리는 바로 강행군을 시작했다. 점심식사를 하며 힝구와 아현이는 서로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것 같았다. 평소 내 친구들과 말을 잘 이어가지 못하는 힝구가 아현이와는 술술 대화를 하는 것 같아 신기했다. 힝구는 아현이의 마성에 빠져버렸다. 아현이도 낯을 가리는 사람이지만 ‘나’라는 공통분모가 있는 사람에겐 특별히 부끄럼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상대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적정한 대화 주제를 던질 줄 아는 아현이와 어울려 어느새 힝구와 나는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 있었다. 바쁜 도시 속에서, 호텔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매일

같은 사람과 비슷한 일을 하는 힝구의 직장이나, 안정적이었던 내 교직원의 삶과는 달리, 고급스러우면서도 성과지향적인 업계의 특성을 반영했기에 흥미진진하고 섹시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 속 무언가를 성취한 경험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한 우리 앞에 아현이는 자본주의 속에 피어난 세련된 여전사였다. 유명한 글로벌 회사의 중역들을 상대하며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 할 줄 아는 멋진 아현의 모습에 내 지금의 모습을 조금은 반성했다.

‘나, 좀 나태하네?’  


아현 환영 식사 후, 금문교를 넘어 소살리토로 향했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금문교 이후 백만장자들의 보금자리가 해안가 언덕에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는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해.”

힝구와 연애하던 시절 몇 번 갔던 젤라또 가게에 들렀다. 소살리토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여서 늘 손님들로 북적였다. 너무 많은 종류의 아이스크림 사이에서 고민하던 아현이는 2개의 아이스크림을 샘플로 먹어보았다. 아현이가 무슨 맛을 먹을지 뒤로 물러서서 잠시 망설이자 자그마한 이탈리아 점원이 무엇을 먹을 거냐고 아주 공격적으로 물었다.

“뭘 저렇게까지 무섭게 물어봐?”

갑작스러운 공격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태도에 대한 합리적인 추측은 맛보기만 하고 먹튀 하는 관광객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정도다. 호전적인 점원의 태도에 순진한 아현이는 맛보기 한 아이스크림 두 가지 맛을 모두 먹겠다고 했다. 어리바리한 사람은 어딜 가나 티가 나는가 보다. 점원의 공격적인 세일즈가 통한 것이다. 아현이가 두 가지 맛을 고른 덕택에 나는 너무 맛있었던 피스타치오를 뺏어먹으며 여러 가지 맛을 먹어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역시 내가 아현이와 친구인 이유는 뭔가 어리 한 듯한 모습이 서로 닮아서 일거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짧게 산책을 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운다. 힝구는 금문교와 태평양을 관망할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로 우리를 안내했다. 완만한 구릉과 깎아지는 절벽 사이 해안 도로를 유유히 지나니 풍경의 일부가 된 듯했다. 우리는 해안의 모습을 보다 잘 보기 위해 군용 참호 근처에 차를 세웠다. 해가 바다를 은은한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덩그라니 홀로 있는 벤치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봤다. 아현이의 번아웃(Burn out)이 웜아웃(Warm out)으로 바뀌어지길 바랐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난 후, 더 높은 곳에 올라서고 싶은 마음이 들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올라섰다. 힝구가 손을 내어줘서 겨우 올라간 그 구조물은 높이가 1.8m 남짓 되었다. 그곳에서 태평양을 마주하자 훨씬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된 듯했다. 실컷 태평양을 봤으니 어느덧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차로 돌아가려 하던 바로 그때, 우리는 문제가 생긴 걸 발견했다. 아현이와 나는 쫄보라 올라간 그곳에서 좀처럼 내려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힝구는 폴짝 뛰어내렸지만 쫄보 둘은 구조물 위에 남겨져 어쩔 줄 몰라 웃기만 했다. 당혹스럽고, 뭔가를 할 수 없을 때는 포기의 헛웃음이 육성으로 터져 나온다. 나는 의미 없이 ‘으앙, 어떻게 너무 무서워.’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현이도 이 상황이 웃기는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계속 바다를 바라보며 웃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 힝구로부터 내려진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바로 힝구의 등으로 뛰어내려 어부바를 하는 것이다. 그조차도 우리의 몸통이 힝구의 등에 닿기까지 공중에 떠야 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나에게는 무서운 도전이었다. 아현이는 자기가 먼저 하겠다며 용기를 냈다. 그리고 오늘 처음 본 친구의 남편 등 위로 뛰어내렸다.

“으악”하며 짧은소리가 났고 아현이는 무사히 땅 위에 안착한 뒤 이내 허리 숙여 웃어댔다. 아현이의 도전에 힘입어 나도 힝구 등으로 뛰어내렸다.

“첨 본 남자 등에 업혔데요.” 무사히 뛰어내린 나는 아현이를 놀렸다.

우리의 웃음소리는 언덕을 가득 채웠다. 힝구가 없었으면 우리는 집에 가지 못했을 거다.


힝구는 어둠이 내린 유니온 스퀘어에 차를 세웠다.

“오늘 우리 기사 해줘서 고마워 자기. 내일 만나.”

힝구를 한국에 보냈을 때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그와 떨어졌기에 약간 슬픈 마음이 들었다. 힝구와의 헤어짐을 뒤로한 채, 아현이가 직원할인을 통해 예약한 웨스틴 호텔에 입성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유니온 스퀘어 바로 앞. 최고의 위치에 있는 호텔에서의 6박이 시작되었다. 아현이는 내가 알던 모습을 벗어던지고, 아주 사회적인 얼굴과 말투를 장착하고선 체크인을 도와주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웨스틴에서 일해요. 이 호텔은 정말로 특별하죠. 내 이력서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요.” 끊임없는 대화와 웃음 속에서 새로운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직장생활은 어설프고 순수한 우리의 모습을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듬어 놓았다. 덤벙거리고 삐뚤빼뚤한 우리가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아현이의 친절한 플러팅 덕분인지 우리는 전망 좋은 곳에 방을 배정받았다. 새하얀 호텔 침대에서 자는 건 언제나 기분 좋다.


나도 아현이도, 긴 여정 이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힘들었지만 그 덕에 배가 고파져 뭐라도 먹어야 했다. 아현이는 여섯 개의 컵라면을 준비해 왔다. 아현이의 남편이자 20년 지기인 남형이가 준비해 준 물품이다. 물 끓이는 커피포트가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지를 발휘해 드립커피머신에 물을 채워 뜨거운 물을 받아낸 후 라면을 익혔다.

“어 큰일 났어.”

잘 익은 라면을 먹으려던 그때, 우리는 또 다시 문제에 봉착했다. 젓가락이 없는 것이다. 아현이는 커피를 젓는 스틱을 이용해 후루룩 라면을 마실 수 있을 것 같다며 미리 시범을 보여줬다. 숙련된 조교가 능숙한 솜씨로 라면을 해치웠다. 나는 아현이 보다는 버벅였지만 그래도 국물조차 남기지 않고서 라면을 흡입했다. 새로운 도전을 성공으로 이끈 조교 덕분에 앞으로의 여행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현이는 남형이에게 전화했다.

“남형아. 뭐 잊은 거 없어? 라면 먹는데 말이야.”

“뭐? 김치?”

김치 같은 소리를 하는 남형이는 정말 젓가락을 새까맣게 잊었나 보다. 아현이는 남형이에게 오늘 하루 일과를 공유했다. 귀여운 친구 커플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힝구가 보고 싶어졌다. 나도 힝구에게 카톡을 했다. 힝구는 게임을 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텍사스에서는 컴퓨터가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게임이니 본가에서는 마음껏 했으면 하는데 게임을 하면서도 내 눈치를 보는 힝구가 이상하다. 아직도 자기가 10대인 줄 아나보다. 아니면 내가 자신의 엄마인 줄 아는 건가?

길었던 하루가 저물고, 우리는 내일을 기다리며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잘 자 아현아.”

“찐이도 잘 자.”

5개월 만에 힝구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잠을 잤지만 마음이 너무 편안했다. 드디어 만난 아현이와의 여행이 본격 시작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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