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시간 속, 친구와의 만남

2월의 랑데부

by 한양희


시간은 왜 이리 묘한 것일까요? 얼른 흐르길 기다릴 때는 좀처럼 가질 않더니, 돌이켜 보면 이미 쏜살 같이 흘러 아득하기만 합니다. 열심히 글을 쓰리라, 브런치 작가신청서에 썼던 다짐이 야속할 정도로 나는 그간 글을 업로드하지 않고 있었네요. 미국에서 백수로 산지 벌써 8개월이 되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간 있었던 일을 되짚어가며 다시 글을 쓰려고 합니다. 글을 아예 쓰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소설이란 걸 쓰고 있기도 했고, 나름 바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백수에게 글 쓸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지요. 보상이 없는 꾸준함을 유지하기가 참 어려웠다고 변명 아니 변명을 해봅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내가 다시 기록을 위해 돌아왔다는 것이죠.


2월 25일. 내 친구가 미국을 찾아왔습니다. 미국에서 사는 4개월 동안 힝구가 출근하고 없을 때 홀로 지내온 나를 보러, 그리고 번 아웃이 찾아온 자신의 마음을 달래러 ‘아현’이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온 것이죠.

웨스틴의 지배인인 아현의 직장 혜택 덕택에 샌프란시스코 중심에 있는 유니언 스퀘어 최고급 호텔을 싼 가격에 머무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아현이는 항공사에

근무하는 힝구의 항공혜택으로 싸게 미국에 올 수 있었고요. 윈윈이란 것이 이런 게 아닐까요? 우리는 경제적인 것에서부터 취향에 이르기까지 환상의 여행 콤비였습니다.


예술을 좋아하는 우리는 샌프란에 있는 주요 미술관 3군데를 방문했고, 샌프란만이 주는 바이브를 느끼기 위해 도시와 공원 곳곳을 누볐습니다. 공원에서는 따뜻한 켈리포니아의 햇볕을 받으며 명상을 하기도 했어요. 우리는 나의 취향으로 인해 채식 위주로 식사를 하면서, 거리 구석구석을 걷고, 밤에는 서로를 위해 챙겨 온 마스크 팩을 매일 붙이고 잤습니다. 아현은 미국에 오면 햄버거와 고기만 먹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도치 않은 몸과 마음의 클렌징을 하게 되어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기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2월의 차가운 바닷속에서 수영하는 이들을 보며 대신 덜덜 떨었고, 세일즈 포스 본사 건물에 들어가 세계적인 기업에서 일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지요. 친절한 호텔의 컨시어지 담당자는 우리 둘에게 조식 쿠폰을 주기도 했고, 호텔 꼭대기 층으로 초대해 샌프란의 야경을 보여주기 까지 했어요. 샌프란에서의 마지막 밤, 호텔 앞에서 영화에 나올 것 만 같은 정말 멋진 남성 둘이 키스를 하며 헤어지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샌프란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선물을 받았다며 키득거렸답니다. 모든 일정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마무리되었고, 우리는 이 여행이 서로의 인생여행이었다며 고마움을 표했죠. 6박 7일이었던 우리의 여행은 하루에 2만 보 이상을 걸으며 샌프란시스코를 종횡무진하는 체력전이었습니다. 여행을 마무리 짓고 텍사스로 돌아온 나는 힝구가 놀랄 정도로 날씬해져 있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여행하며 걸었던 덕에 살이 빠진 나에게, 힝구는 아현이를 자주 미국에 데려와야겠다고 하더라고요.

아현이 방문했던 2월은 정말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현은 외로웠던 미국생활에서 스스로를 잃고 방황하고 있었던 나에게, 외부적인 자극을 전해준 선물이었거든요. 아현은 현재 한국에서 자신의 업무에 대해서, 그리고 미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해 줬습니다. 자신의 친구들 중 미국에 사는 이들이 어떤 커리어 패스를 가지고 발전해 나가고 있는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 있는지 까지 함께 고민해 주었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의심하고 그저 어서 영주권이 나와서 이곳을 떠날 수 있기를 바라기만 했던 무기력한 나에게 나는 생각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지금까지 주체적인 삶을 살았기에, 향후에도 그럴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간 아현. 정말 보석 같은 내 친구가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선물해 주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서도 계속해서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자신이 회사에서 겪었던 번아웃(Burn out)이 웜아웃(Warm out)되었다고. 따뜻하고 힘차고 건강한 마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녀 덕분에 웜아웃 되었지요.


묘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친구와의 만남은 빠르게 지나갔지만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기억됩니다. 손에 잡힐 듯 느리게 흘러가는 백수 일상의 나날은 머릿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데. 다시 한번 느낍니다. 시간이란 참 묘하네요.


태평양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나와 아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작품과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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