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미국 횡단기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로

by 한양희

어찌어찌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한 이은진은 후련한 마음으로 캘리포니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번 여정의 가장 큰 미션이 운전면허취득이었기 때문에 이젠 안전하게 텍사스 집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이 먼 길을 달려왔는데, 바로 집에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우리는 약간 둘러 가더라도 주변의 관광지에 들러 가며 집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첫 번째 목적지 라스베이거스에 당도했다.



사막 한가운데 만들어진 향락의 도시는 호텔과 음식점들로 번쩍번쩍거리고 있었다. 평소 맛있는 음식을 구경하기 어려운 미국 땅에서 맛잘알 한국인들이 블로그에 추천해 놓은 호텔 뷔페를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꽤 비싼 돈을 낸 만큼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기에 기존의 미국음식 보단 나았지만 같은 값에 한국 특급호텔의 뷔페였으면 더 맛있었을게 분명하다. 하지만 돈 쓴 자의 마음에 거슬리는 소리를 할 수 없었기에 나의 내적 국뽕은 조용히 혼자만의 생각으로 묻어두고 연신 ‘우와, 맛있다.’를 외쳤다. 라스베이거스는 다양한 테마로 운영하는 호텔들이 많아 그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도시다. 하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이은진에겐 사막 위의 파라다이스는 인위적인 데다 상업적 요소가 강해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관광객이 모인 불 쇼와 분수 쇼도 시시하긴 매 한 가지. 이십 대 초반 엄마와 간 마카오의 호텔들을 봤을 때 느낀 ‘와우’를 다시 느끼기엔 내 경험치가 너무 많이 쌓여있었다.


다음날, 자이언 캐년(Zion Canyon)으로 향하려는 아침. 나의 애마 용용이 왼쪽 뒷바퀴가 주저앉아있었다. 못이 박힌 모양이다. 고속도로를 타기 전에 알아서 다행인 상황. 힝구는 한가한 골목에 차를 세워 스페어타이어를 갈아 끼운 다음, 먼 길을 가기 전 원래 타이어로 바꿔야 한다며 근처 카센터에 가서 지렁이를 샀다. 뭐든 스스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 남편은 코스트코 뒷마당에서 직접 타이어의 구멍을 매웠다. 항공정비를 하는 사람이 이 것 정도는 혼자 해야 한다 해놓고선, 어찌나 낑낑거리던지, 내 도움이 없었다면 최소 2시간은 더 걸렸을 거다. 만원이면 매워주는 한국의 카센터가 그리운 순간이었다.


대자연은 언제나 내가 한없이 작은 존재인지, 내가 겪는 사소한 어려움이 슬퍼하거나 분노할 것 없는 티끌 같은 것임을 늘 일깨워 준다. 아메리카. 그 거대한 대륙을 횡단하며 마주하는 황량한 벌판과 이름도 없는 눈 덮인 산들이 조그마한 나를 끌어안았다.


마침내 도착한 자이언 캐년에서 이틀간 3개의 트레일을 걸었다. 황토로 빚어 올린 듯한 협곡이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한국의 가파른 산들에 비하면 미국 국립공원의 트레일들은 대부분 잘 포장되어 있어 겁먹을 필요가 없다. 그저 한 발 한 발 앞으로 툭툭 내딛으면 내 몸은 다리에 실려 어느덧 내가 생각했던 곳에 도착해 있다. 두 발로, 두 다리로 높은 산을 오른 기억은 현재의 슬픔과 고단함을 이겨낼 힘을 만들어 낸다. 언젠가 계획대로, 의지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 산을 탄 기억, 그것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산을 오른 그 기억으로 멋지게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지 다짐해 본다.


9일간의 미국 횡단이 끝나고 휴스턴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내 손에는 캘리포니아 운전면허 시험 합격증이 쥐여있다. 장거리 운전이라는 경험치도 쌓였다. 베스트 드라이버의 진면모를 텍사스에서도 당당히 발휘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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