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 방문기 2
부모님 집에 드디어 도착한 우리는 몰래 온 힝구를 숨겨 놓았다가 짜잔 하며 보여주는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모두 나보다 힝구를 더 반가워하는 리엑션을 취했지만 그래도 혈육인 내가 훨씬 보고 싶었겠지? 그러나 할머니는 진정으로 힝구가 더 반가운 것 같아 보였다. 힝구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로 계속 이야기해도 그 옆에 앉아 차분하게 들어주는 착한 손주사위니 말이다. 그날 92세의 김순조 여사는 자신이 얼마나 집에서 열심히 일하는지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오전에는 나무를 베었다 말씀하셨다. 불길한 예감에 정원으로 나갔고, 나는 30년 된 왕겹벗꽃 기둥이 잘려있는 것을 확인했다.
꽃에 원수라도 졌는지, 정원의 철쭉 가지를 댕강 댕강 40 포기 정도 잘라놓은 할머니의 독특한 정원 관리가 벚나무에까지 미친 것이다. ‘이 일을 알면 엄마가 기절하겠는데.’ 속으로 생각했지만, 집안의 평화를 위해 엄마가 스스로 발견하기 전까지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할머니는 두 포기의 호박에 햇볕을 드리우기 위해 날이 무딘 그 톱으로, 그 연세에, 귀한 벚나무를 잘랐고, 우리 집의 벚나무 울타리는 중간에 구멍이 뻥 하고 생겨버렸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아빠와 아침 산책을 다녀온 힝구는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런 드라마가 여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니, 나는 진정으로 집에 온 것이 맞았다.
엄마, 아빠와는 늘 페이스 톡을 해서 그런지 내가 미국에 간 적 조차 없는 것 같이 가깝고 정답게 느껴졌다. 7개월의 공백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은해사에 들러 산사가 주는 고요한 정취에 취해도 보고, 코스트코에 들러 필요한 물품들을 사는 등 일상을 누렸다.
출근을 위해 힝구는 먼저 미국에 돌아가야 했고, 그전에 우리는 다시 천안에 계신 어머님을 찾아가 공주의 찻집 루치아의 뜰로 모셨다. 평소 집을 꾸며 빈티지 사업을 하고 싶은 어머님께 일종의 영감을 드리기 위함이었다. 어머님은 그 좁은 골목길 한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한옥에 젊은이들이 붐비고, 나태주 시인이 들려 회의를 하는 장면을 보며 꽤나 깊은 인상을 받으신 듯싶었다. 봄볕은 따사롭고,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줄을 잇는 골목을 보며 어머님도 한껏 자신의 희망찬 미래를 그려보시길 바랐다.
힝구를 미국에 보내고, 나는 외할아버지 제사를 위해 처음으로 외할머니가 없는 외갓집에 가서 유년시절을 다시 만났다. 가족 모두 함께 산에 올라 머위와 고사리를 뜯고, 그걸 가져다 나물 반찬을 해 먹었다. 미국에서 그토록 먹고 싶던 초록빛 가득 찬 밥상을 대하니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외할머니의 요리솜씨를 물려받은 큰 외숙모의 음식 덕분에 3일 내내 할머니와 함께 있는 듯했다. 어른들은 밤늦게 까지 술을 마시며 옛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릴 적처럼 동생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덧 출국일이 다가왔을 때, 나는 어머님과 함께 미국에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탄 버스가 공항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바람에 어머님 혼자서 출국해야 했다. 비행기를 놓쳐버린 나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서울에 사는 친구들을 보러 갔다. 태교 여행을 떠나기 전날임에도 다돌이 커플은 나에게 저녁을 사주었고, 2월 샌프란을 방문한 아현이네 커플은 따뜻한 잠자리까지 제공해 주었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보물 같은 친구들 덕에 나의 한국행은 더없이 즐겁게 마무리 지어질 수 있었다.
이젠 마음만 먹으면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되었다. 자주 한국에 가지 못하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갈 수 없다는 제약이 걸리면 더 가고 싶은 법 아니겠는가? 이제는 자유로이 날아다니려 한다. 나를 옥죄던 이동 자유의 제한을 훨훨 풀어 벗어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