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기숙사에 들어가던 그날이 생각났다
2월 말의 차가운 공기는 곧 다가올 봄에 마지막 밀치기를 하고 있었다. 바람은 찼지만 화창하고 맑았다. 일 년에 한 번 외부인 출입이 허용되는 신입생의 이삿날. 캠퍼스에서도 가장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야 겨우 닿는 아현동의 한우리집 입소를 위해 아빠는 생에 최장 거리를 자가용으로 운전했다. 지방에서 갓 올라와 학교생활에 적응하기도 어려울 텐데, 기숙사가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조바심을 낸 터라, 깨끗하고 잘 정돈된 한우리집을 보고 엄마, 아빠도 마음의 한 짐을 덜었다.
두 개의 건물, 3층 복도를 잇는 두 번째 방이 내가 일 년 간 지낼 집이었다. 아직 나와 함께 지낼 룸메이트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엄마는 입구에 붙은 룸메이트의 사진을 보며 ‘애가 착하게 생겼네, 잘 지낼 수 있겠다.’ 하고 또 한 번 안심했다.
옷을 붙박이장에 넣고, 핫 핑크색 이불을 침대 위에 펼쳤다. 얼추 정리가 된 듯하자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제 부모님은 나가야 한단다. 기숙사 시설을 소개하고 투어 하는 오리엔테이션 때문이다.
“엄마, 아빠 이제 가야 되겠네, 태워줘서 고맙데이.”
“응, 진아. 몸 잘 챙기고, 잘 지내고. 새로운 곳에서도 항상 당당하게, 파이팅이야.”
“알겠데이, 걱정하지마래이. 내 이제 오리엔테이션 가볼게. 엄마, 아빠도 조심해서 내려가라. 고맙고 사랑해.”
“우리도 사랑해.”
우리는 순수한 시골사람들이라 방송에서 시키는 대로 곧장 행동했다. 엄마는 나에게 편지를 하나 지어 주며 눈물을 보였다. 아빠는 그런 엄마의 어깨를 감싸고 기숙사 방을 나섰다. 엄마, 아빠와의 첫 이별이자 아직은 한참 어린 어른으로서 첫출발이었다. 엄마, 아빠와의 이별의 순간 느끼는 슬픔보다 나의 시골스러움을 감추고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해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에 부담감이 느껴졌다. 사감선생님을 쫓아다니며, 식당, 체력 단련실, 세탁실, 독서실, 휴게실, 샤워실을 차례로 둘러보며 기숙사 생활에서의 주의사항에 대해 들었다. 11시 이후는 통금이고, 외박 시에는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하며, 이를 어길 시에는 벌점이 부과되는데, 30점의 벌점이 붙으면 기숙사에서 쫓겨난다는 무시무시한 엄포가 있었다. 원래 규칙을 잘 지키고 어른들이 한 말이라면 찰떡 같이 듣는 나였기에 그런 규칙 따위를 따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기숙사 투어가 끝나고 방에 가니, 룸메이트가 와있었다. 부산사투리를 빡세게 쓰는 지원이는 부산외고를 나왔다고 했다. 방 앞에 붙어있는 사진과는 다른 얼굴이었지만 그 애도 내 사진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 여겼다. 서로 잘 지내보자며 호기롭게 인사했다. 어색했지만 1년간 한 공간에서 함께 호흡할 그 애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내심 안도했다. 그 애의 모교인 부산외고에서는 이대에 같이 진학한 친구들이 많았나 보다. 이내 몇몇 친구들이 방을 찾아왔고, 인사를 나눴다.
그러던 중 나에게도 아는 얼굴이 찾아왔다. 신체검사 하는 날 마주친 명규였다. 처음 본 명규는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무섭기까지 했는데(그 애는 짧은 숏커트에, 흰색 브릿지 긴 머리를 15가닥 달고 스모키화장을 아주 진하게 했었다), 기숙사에서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우리는 같은 층에 살게 되었고 그 덕에, 명규의 룸메이트이자 내가 제일 사랑하는 대학교 친구, 아현이와도 만날 수 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알아가게 될지 모르고 어색하게 첫인사를 나눴다.
하루 동안 낯선 사투리와 낯선 얼굴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어떤 정보를 택하고 어떤 정보를 밀어내야 하는지 몰라 머릿속은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갔다. 태연 한척하는 나는 내가 보이고 싶은 나로서의 모습을 잘 수행했는지 체크했지만 피드백을 받을 수 없었다. 처음 기숙사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이제 곧 다가올 개강을 준비해 수강신청이란 걸 어떻게 하는지 신입생 OT에 다녀온 지원이에게 전해 들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신입생 OT에 오라는 연락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나는 사회대 생활에서 조금은 겉돌았다. 학교 입학 전, 며칠 밤을 같이 보내며 친한 친구가 생겼다면 내 학교생활도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교직원이 된 지금. 그런 실수를 저지른 그 누군가에 대한 작은 분노가 잠시 차올랐다 사그라든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내가 자는 곳은 서울 한복판이 되었고, 생전 알지 못하는 어떤 아이가 내 옆에 누워있었다. 잠들기 전, 엄마가 남기고 간 편지 봉투를 열었다. 엄마는 나를 보내기 하루 전날 밤, 이 편지를 썼다. 작은 어른으로 성장하며 먼 곳에 처음으로 떨어져 지낼 나를 생각하며 엄마는 걱정 어린 마음을 편지에 쏟아부었다. 엄마는 내가 떠나서 슬프고 걱정스럽지만 내가 잘 지낼 거라 믿고, 나를 응원한다고 했다. 편지에는 엄마가 따다 말린 네잎클로버들이 붙어 있었다. 눈물이 막 났다. 옆에 있는 지원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소리 없이 울었다. 벌써부터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려는 때에, 아직도 성장하지 못한 나의 일부는 엄마가 있는 집에 두고 온 모양이다. 새로운 시작을 담담하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솔직히 겁이 났다.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고 설렘보다는 숨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아직 모르는 세상을 접하기에 나는 어린것만 같았다. 아는 사람도 없고, 내 마음 알아줄 이 없는 서울에서 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무서웠다. 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엄마의 편지에서 내 진짜 모습을 읽어버렸다. 나는 안 괜찮구나. 엄마, 아빠에게 걱정 말라했지만 사실은 나도 무서웠고, 준비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이제 어리바리한 시골 풋내기에서 벗어나 서울에 사는 여대생이 되어야 할 때가 된 거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내일을 생각하며 익숙한 것과 이별하고 너무 많은 새로운 것을 마주한 날, 나는 어린 어른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