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이민길에 올랐다

시어머니의 저장강박장애

by 한양희

결혼 전, 남편과 함께 나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나서 시어머니의 대구집을 처음으로 찾아갔다. 만촌동의 한 교회 옆, 빨간색지붕이 덮여있는 집이었다. 남편이 남자친구였던 시절, 데이트를 할 때 빈티지한 감성의 카페를 많이 찾아다녔는데, 그때마다 남편은 엄마집도 이렇다며 각종 소품으로 가득 차 있어 바로 카페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었다. 그런 남편의 말은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렸다. 빈티지한 소품만 많다고 해서 빈티지 감성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어머님의 대구집 안

교회주차장 옆 높은 회색 시멘트벽이 집의 가장 긴 옆면을 이루는 허름한 주택은 가파른 비탈길 쪽으로 대문이 나있었다. 허나 그 대문은 잡초더미로 막혀있어 옆에 나있는 알루미늄 쪽문이 이 집을 드나드는 주요 출입구였다. 나는 독특한 구조의 허름한 그 집이 힙 한 카페가 될 수 있는 재목임을 알아봤지만 그 집이 카페가 된다는 건 현실화될 수 없는 일임을 안을 보고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머님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 봤던 모습처럼 부스스한 머리와 세수조차 하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반기셨다. 집안은 어디서부터 나는지 알 수 없는 쿰쿰한 냄새로 가득했다. 예쁜지 안 예쁜지 구분할 수 없는 각종 물건들이 집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바닥은 신발을 신고 다녀 먼지와 흙이 떨어져 있었다. 화장실은 별도의 문이 없었고, 방이라 불리는 곳에는 침대 위에서부터 천장까지 봉지로 쌓인 알 수 없는 물건들이 테트리스처럼 쌓여있었다.


시어머님은 옷이나 디자인을 보는데, 나름의 감각이 있는 분이다. 빈티지라고 말할 수 있는 복고풍의 옷들을 구해 집안 곳곳과 창고에 가득 쌓아 놓으셨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그 옷들은 비닐봉지 하나하나마다 싸여 곰팡이가 슬고 천이 삭아 바스스 가루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봉지들은 집안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스무 개를 풀면 그중 하나는 요즘도 입을 수 있는 멋진 옷이 있었다.

나 역시 빈티지 옷을 좋아하고, 헌 옷들 속에서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보물을 찾아내는 데 쾌감을 느끼기에 간혹 보이는 어머님의 센스에 놀라기도 한다. 특히 지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변화와 환경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활용과 업 사이클링 차원에서 물건을 다시 쓰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그랬기에 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온 후, 집을 정리하고 청소하던 초기에는 시어머니의 창고에서 옷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물론 어마어마한 쓰레기에 항복하게 되며 선별작업을 포기해 버렸지만 말이다. 지구를 지키겠다던 환경론자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산 빈티지 옷
시어머니가 주신 빈티지 옷




80년대 말, 90년대 초, 한국사회에서 미혼모를 보는 눈은 지금보다 더 혹독했을 것이다.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그 시선을 어떻게 시어머니가 홀로 삼켜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경제적 자립을 중시하던 그녀는 매일 밤낮으로 일했고 어렸던 내 남편은 남의 손에 맡겨졌다. 홀로 남겨져 엄마를 기다렸을 어린 시절 내 남편을 지금의 내가 알았더라면, 나는 그 가여운 아이를 꼭 끌어안아 주고 싶다. ‘사랑하는 아이야, 너는 나중에 사랑하는 이를 만나서 더 큰 가족이 생기고, 더 많은 네 편이 생길 거야.’ 머릿속에다 이 사실을 심어놓고, 과거에 겪었었던 어려운 일들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희망을 새겨놓고 싶다. 멋모르고 열심히만 사는 우리 시어머니의 손도 꼭 잡아주고 싶다. 자신 앞에 놓인 선택에 좀 더 신중할 수 있길, 자신과 자녀를 위해 좀 더 공부하길, 타인의 마음을 읽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 더 키우길 부탁하고 싶다. 하지만 나에겐 타임머신이 없고, 어려웠던 세월을 지나온 그녀를 마주하는 일 밖에 할 수 없다. 지금의 시어머니는 세월에 치여 굳은살로 꽁꽁 싸매져 있다. 부드러운 말과 다정한 마음이 가 닿기에는 너무 딱딱한 벽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다.


1990년, 어머님은 멋진 옷을 입고 다녔고 키가 크고 얼굴도 예뻐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홀로 아이를 키우던 그녀는 돈을 좀 더 벌어보겠다고 발 사업으로 번 돈으로 찻집을 열었다. 그녀는 자신의 미적 재능을 실현하기 위해 찻집 인테리어에 많은 돈을 부었다. 하지만 그녀의 디자인적, 미술적 감각은 시대상과 주요 고객들의 취향을 반영하지 못했다. 마루를 자연스럽게 하겠다고 불로 지지기도 하고, 온갖 미제 소품을 구해다가 벽에 걸어놓은 그 찻집에는 주로 중년의 남성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시청과 법원 사이에 있었던 그곳은 아저씨들의 쉼터였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입에 담지 못하는 음담패설로 가득 찬 곳이었다. 시어머니는 찻집을 운영하며 모든 남자들이 똑같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학력이 높든, 낮든, 다 저질에 속물이라고.


시어머니가 서른을 넘기고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을 무렵, 찻집에는 미국에서 박사를 했다는 손님이 드나들었다. 그는, 오래전 과학기술계에서도 거물들과 함께 한국과학기술의 초석을 세우는 일들을 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IBM사에 다닌 엘리트였다. 찻집의 다른 손님들처럼 욕지거리를 하거나 여자들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는 사람. 시어머니는 그 사람을 남편의 아버지로 점찍었다.


미국 시민인 시아버지는 당시 60세, 어머님보다 스물여덟이나 나이 많은 할아버지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어머님이 아버지뻘 되는 나이 많은 시아버지에게 끌렸던 이유가 자라나면서 부재했던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미국에서 박사까지 한 사람이라면 모자를 거뜬하게 먹여 살리고, 아들의 교육에도 힘을 써줄 거란 계산이었을 거다. 어머님은 김박사와 살림을 차렸고, 내 남편은 드디어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결혼을 말렸다고 했다. 왜 그때 그 말을 듣지 않았는지 이제와 어머님은 나에게 후회의 말을 전했다.


나의 남편은 6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외국에, 그것도 캐나다에 관광을 위해 여행을 떠나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시아버지가 시어머니와 데이트를 하던 시절, 그는 모자를 캐나다를 데려갔고 어머님께는 아주 비싼 무스탕과 구찌 가방을 선물했다. 어린 내 남편은 엄마와 캐나다의 드넓은 국립공원을 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한다. 전에 겪어보지 못한 스펙터클한 구애가 펼쳐지자 어머님은 그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나라도 홀라당 넘어갔을 것 같다.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 것 같으니 말이다.


그 후, 시어머님에게 돌아온 건 혼인신고로만 이루어진 결혼생활이었다. 시아버지는 잠깐의 한국방문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그가 한국과 미국을 오고 가는 동안 아이들이 태어났다. 남편에게는 남동생 둘이 생겼다. 시아버지는 올 때마다 몇 푼의 돈을 쥐어 줬지만 산후조리도 하지 못한 채 혼자서 아이 셋을 돌보며 어머님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도저히 앞을 헤쳐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던 그녀는 결심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가서 살기로.


그리하여 내 남편은 초등학교 5학년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꽃 분홍 미래를 꿈꾸며 시어머니는 아들 셋과 함께 미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녀는 또 한 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시아버지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은퇴 후, 직업도 없었고 그나마 조금 나오는 연금으로 다섯 식구가 먹고살아야 했다. 그 와중에 혼자서 이리저리 여행을 다니며 이름만 대면 알만한 높으신 회장님들과 어울려 다녔다고 했다. 고집은 또 어찌나 세었는지 매일을 전쟁같이 싸웠다. 딸 같은 아내가 새로운 사회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영어를 가르쳐주는 일도 없었다. 뭐라고 불만을 말하거나 징징 거린다 싶으면 무료로 기탁한 물건들을 파는 바자회에 가서 1달러짜리 물건들을 살 수 있게 쇼핑을 시켜주며 불화를 잠재웠다. 시어머니의 물건 사재기와 물건 쌓기 중독은 그곳에서부터 출발했다. 혹여나 이 결혼이 파탄 나면 이때 모운 빈티지 소품들을 한국에다 팔아 아이들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도망갈 기회를 보던 그 결혼은 지금까지 이어졌고, 시아버지는 90 노인이 되었다. 어머님이 모았던 소품들도 몇 차례 컨테이너에 실려 태평양을 건넜지만 그 물건들 중 팔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팔려는 시도가 애당초 없었기 때문이다. 깡통을 주워 팔정도로 어려운 형편에도 쓰레기들은 사 모았던 어머니. 처녀 적, 한국에서 집을 살 정도로 돈을 번 경제적 마인드는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그녀는 물건들을 모으기만 했다.




대구집을 가득 채운 물건들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어머님은 동네 사람들이 놀러 와서 ‘이거 2만 원에 줘, 3만 원에 줘.’라고 해도 결코 팔지 않았다.

“이게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모운 물건인데, 그 값 받곤 못 팔지.”

당당히 10만 원을 부르는 어머님. 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는 그 누구도 사지 않을 높은 가격을 불러 댄다. 나는 그녀가 결코 물건을 팔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있다. 언젠가는 빈티지 소품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 물건 전체를 천만 원에 사겠다고 제안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 고마운 제안을 거절한 어머님의 물건에 대한 집착은 무덤에 까지 물건들을 지고 가야 할 정도다.


나는 집을 나오고서야 시어머니의 이런 상황을 단순한 ‘물건에 대한 집착’ 정도로 취급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그녀가 쌓아놓은 물건을 치우며, 그것이 일반적 의미의 ‘병적’ 행동이라고 생각했지만 전문적 의미의 ‘정신병’적 질환으로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리를 두고 그녀를 이해해 보고자 하는 노력 끝에 그녀의 행동이 정상적 행동 스펙트럼에서 수용될 수 없는 부분이 많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머님의 물건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저장 습관은 바로 ‘저장강박장애’라는 강박증 증상으로 정신건강 문제 중 하나인 것이다.

저장강박증, 혹은 저장강박장애는 어떤 물건이든지 사용 여부와는 관계없이 계속 저장하고, 그러지 않은 경우 불안한 감정을 느끼는 질환이다. 이러한 장애는 과도한 불안과 두려움, 혹은 유전적 요인이나 뇌의 화학 불균형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


나는 정신분석의는 아니지만 어머님의 경우, 과거의 트라우마와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이러한 증상이 생긴 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어린 시절 가정의 파탄, 고아로써의 삶과 남성으로부터의 신체적, 정신적 학대, 평탄하지 않은 이민후의 삶과 고립. 이 모든 것이 켜켜이 쌓여 어머님은 자신을 보호하고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물건들을 쌓아왔을 것이다.


넷플릭스 “Hoarders” 시리즈는 저장 강박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는 저장 강박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대부분의 출연자들은 시어머니처럼 집 안에 물건을 가득 쌓아놓고 살고 있는데, 이들은 트라우마나 과거의 손실로 인해 안전하고 보호받는 느낌을 얻고자 물건을 모으게 된 경우가 많다. 강박적으로 물건을 모으는 행동이 불안과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이들의 물건을 치우면서 끝이 나지만, 완전한 동의나 치료가 없이 이루어진 청소는 환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버려진 물건들에 대한 감정적 결핍으로 분노, 우울함, 무력감 등의 감정이 더해져 강박증 증상이 더 심해지는 것이다.

Hoarders TV 시리즈

내가 만약 시어머니를 저장 강박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인식했다면 애당초 그 집에 들어가서 살지 않았을 거다. 그녀의 물건들을 치우면서 트라우마를 강화하거나 집안의 분란을 일으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다. 그녀의 현 상황에 대해 남편, 시동생들과 의논하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집에 쏟아부은 많은 노력과 시어머니로부터 입은 상처는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어둡게 했다. 우리는 그저 함께 할 수 없는 사이임을 확인하며 집을 나오고 만 것이다.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는 오늘에도 어머님을 보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여전히 “내 물건 어디 갔어. 어디다 왜 버렸어.”를 반복하며 소리 지르는 어머님의 전화를 받으면 바로 끊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해와 불쾌한 감정은 별개로 찾아온다. 시어머니에 대한 이해와 인내를 과제로 둔 나의 인격은 아직 미성숙하다.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상대가 나를 이해할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나만이 양보를 해야 하는 상황은 불공평하게만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나를 택했다. 나의 감정을 존중하고 이해하기로. 시어머니와 나 사이에 건강한 경계를 설정하기로. 누구든 스스로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한다. 시어머니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아니 이해하지 않더라도 나의 감정은 나대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아직 시어머니를 환자로써 품지 못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원망까지 더해진다면 나는 이곳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시어머니를 분석하고 탐구하려는 나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어머님의 심리적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나는 나 나름대로의 진단으로 관계회복을 위한 첫 단추로 나에 대한 존중을 택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건강한 나는 내 가족, 내 남편을 더 사랑할 수 있고, 시어머니와의 건강한 관계도 꿈꿔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민간요법 같은 자가진단의 효과가 언젠가는 나타나길 바라며 오늘도 시어머니에 대한 글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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