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가면 고생

착각에 빠져사는 시어머니

by 한양희

시어머니가 미국으로 오신 후, 어머님이 계신 집에서 나와 아파트를 얻은 우리 부부는 2,300달러, 한화로 300만 원에 가까운 새로운 지출이 생겼다. 월세는 분명 주거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필수 비용이지만 왠지 모르게 공중에 흩뿌려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싸우고 그날로 시댁에서 도망치듯 나온 터라 집을 찾기까지 돈이 줄줄 새어나갔다. 집을 나오고 첫 이틀 동안 있었던 호텔비, 밖에서 계속 식사를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들었던 외식비, 에어비앤비 7박까지. 살벌한 샌프란시스코의 물가가 더욱 피부에 와닿았던 일주일이었다. 남편은 집을 찾는 동안 회사에 가지 않은 채 계속 휴가를 썼고, 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원과 시간이 불필요한 곳에 낭비되는 것 같아 남편에겐 내색하진 않았지만 불안했었다. 게다가 어머님이 계속해서 전화를 해 “꼴값 떨지 말고 어서 집에 와.”하며 소리 지르시는 통에 심란한 마음은 더 어지러웠다.

아마 어머님도 상상하지 못하셨을 거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고 나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내다가 다시 싸우는 굴레 속에 사셨으니 나도 그에 적응할 거라 생각하셨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 독성 짙은 관계 속에서 나와 남편을 구해야 했다. 한 발짝 물러나 보면 비정상적인 것이 그 안에 속해 있을 때는 그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나는 외부인의 시각으로 남편과 시어머니를 바라봤고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감지했기에 바로 집을 나올 수 있었다. 시댁에서 나와 집을 찾는 며칠간은 몸과 마음이 괴로웠지만 지금의 난 내 결정에 후회하지 않는다. 집을 나온 지 3주. 어느덧 나는 안정을 찾았고, 얼굴이 축났던 남편은 다시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집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한 지 3일 만에 적당한 가격에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다. 밖에 나와 생활하며 만만치 않은 비용을 감당해야 했기에, 시간이 많았다면 따졌을 많은 사항들을 포기하고, 나쁘지 않다 싶은 곳을 택했다. 지원서를 넣고 계약까지 하루가 걸렸다. 집을 나온지 5일만이었다. 미국에서는 내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려면 탄탄한 직장과 좋은 신용등급, 두둑한 통장 잔고가 필요하다. 집주인에게 지원서를 내면, 집주인은 지원자 중에 월세를 잘 내고, 조용하고 얌전히 지낼 것 같은 이를 뽑아 세입자로 삼는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첫 번째 집, 골든게이트파크 옆의 분홍색 집은 부실한 서류준비로 떨어졌다. 월세를 구하는데도 붙고 떨어지는 게 있다니, 세상이 아무리 평준화되어 사는 것이 비슷할지라도 아직도 못해본 새로운 경험은 도처에 널려있었다.

차에 실어놓았던 짐들을 3층에 위치한 1 베드룸 아파트에 옮기며 집을 나온 지 6일 만에 새로운 보금자리에 들어섰다. 짧은 시간 내에 모든 것을 정리한 우리가 기특하기까지 했다. 청소를 하고, 짐을 풀고, 간단하게 저녁을 차려먹은 우리는 평소처럼 산책을 위해 집 밖을 나섰다. 동네를 둘러보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저녁 6시, 3중으로 된 아파트 입구를 열고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살짝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동네는 sketch(불확실한, 이상한, 어쩌면 조금은 위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리는 더러웠고 그나마 보이는 사람들은 검은색 후드를 쓰고 있어 왠지 모르게 수상해 보였다. 여기저기서 라틴계열의 언어가 들려오고 가로수도 없었다. 큰 창문 너머로 보이는 뷰가 좋아서 선택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북향에 햇빛도 잘 들지 않았다. 삭막한 도시의 변두리 느낌. 우리가 이곳에 이사를 오다니. 참 급했나 보다. 이제 저녁을 먹고 동네산책을 하는 우리 부부의 일상은 이케아 간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서재, 거실, 다이닝룸이 한 공간이 되어버린 오늘의 집





시어머니가 중요시하는 건 단 두 가지다. 집과 음식. 그녀는 이 둘에 자신만의 기준을 부과해 다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어릴 적 그녀는 온전한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져본 기억이 없다. 일찍이 집을 나가 딴살림을 차린 아버지. 그를 떠나 다른 남자 집에 들어가 살다 36세에 요절한 어머니. 그녀에겐 집도, 기댈 사람도 없었다. 그랬기에 집이 그녀에게 가지는 의미는 남다를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에게 ‘아무리 더러워도 발 뻗고 잘 곳 있으면 그만큼 든든한 게 없다.’고 하신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더러운 집 한 채를 자신의 무기 삼아 삶을 살아오고 계신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났다면, 청소나 위생, 청결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아셨겠지만, 시어머니에게는 그저 ‘집’만 있으면 괜찮았다. 어머님이 계신 집 안은 먼지가 풀풀 날리고, 알 수 없는 곳에서 주어온 온갖 가구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냄새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시어머니의 보물이자, 우리가 뛰쳐나온 그 집은 시아버지 소유의 샌프란시스코 중심부에 있던 이층 집을 팔면서 나온 차익으로 마련할 수 있었던 집이다. 시어머니가 미국에 오기 전인 25년 전, 시아버지가 샀을 때 5억이었던 그 집은 코로나로 헐값인 23억에 팔렸다. 그마저도 절반은 세금으로, 수익 중 절반은 시아버지의 전처에게로 가고, 남은 돈으로 남편이 빌렸던 이 집의 대출을 다 갚게 되면서 시어머니의 세 아들 이름으로 집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든든한 직장을 가진 아들의 은행대출과 기존 집의 시세차익 덕택에 살 수 있었던 이 집을 어째서인지 어머님은 자신이 아끼고 절약해서 만든 집으로 인식하신다. 자신이 깡통을 주어다가 100만 불짜리 집을 샀다는 착각. 사는 곳마다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옮기며 안고 살았기에 가능했다는 그녀의 주장은 말문을 막는다.


시어머니는 아무런 수입이 없다. 지금껏 나의 남편이 수도, 전기, 가스비며 재산세, 보험료 등을 다 내고, 식료품을 사드렸기에 살림살이 운영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간 큰아들이 쓴 비용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신다. 그녀가 한국에서 생활하던 4개월 간, 남편은 어머님께 자신의 신용카드를 쓰라 전달했고 그녀는 집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1,000만 원에 가까운 돈을 썼다. 물론 그곳은 냉난방도 안 되고 각종 물건과 쓰레기가 가득 찬 창고와도 다름없는 집이지만 말이다. 우리 부부가 집을 나온 지금까지도 각종 세금이며 보험료 등의 비용을 남편이 다 부담하는 데다 이젠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의 월세까지 내고 있으니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자신은 경제적으로 기여한 바 없는 그 집을 당신의 집이라며 “내 집이야! 당장 나가.”를 외치던 시어머니를 떠올리면 다시금 뒷골이 땅겨온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 힘들었고, 삶의 방식이 독특한 걸 알고 있지만 어머님의 행동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시어머니가 미국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 나에게 자식을 위하는 건 부모의 공통된 마음이라고 했다. 나와 남편이 집을 고치고 쓰레기를 버린 것에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실까 걱정하는 내게 엄마는 시어머니가 물건에 대한 집착이 있지만 그래도 잘 이야기하면 자식 생각에 자신의 고집을 꺾을 거라고 했다. 시어머니를 평생 모시고 사는 선배로서 나의 엄마에게 삶의 지혜를 전수받았지만 나의 시어머니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들이 기여한 바는 전혀 알지 못하는 시어머니. 어째서 자식을 그토록 힘들게 하는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시어머니는 아직도 자신이 경제적으로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시어머니가 집을 청소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켜켜이 먼지가 쌓여도 그냥 내버려 두신다. 하지만 유일하게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곳이 있다면 음식물이 흘러넘친 가스버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집에서 딱 한 가지 활동을 하신다. 다름 아닌 요리. 어머님이 집에서 하루를 보내는 주요 일과는 음식 장만이다.

미국 이민 전까지 돈은 벌어봤지만 살림을 살아본 적 없던 시어머니는 자라는 아이들에게 어떤 먹거리를 줘야 하는지 몰라 늘 때우기 식으로 음식을 먹였다고 한다. 피자와 햄버거를 먹으며 큰 아이들.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평균이 훨씬 넘는 키로 성장했지만, 어린 시절 음식을 잘 못 먹인 탓에 늘 비실 비실하다며 과거의 한을 지금 풀려고 하신다. 시어머니는 아이들이 다 자라고난 후에야 요리책을 펼쳐보며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를 읽지 못하는 그녀는 그림을 따라가며 요리책과 비슷한 자신만의 레시피를 개발했고, 그 때문에 집안은 늘 국적을 알 수 없는 음식으로 가득 차있다. 건강한 먹거리라며 시어머니가 스스로 개발한 음식 중에는 맛있는 것도 있고 맛없는 것도 있다. 실험적인 어머님의 음식을 먹는 것은 어떨 땐 곤욕이다. 우유를 넣어 끓인 단호박죽은 간도 되어있지 않아 비렸고, 어디서 캐오신지 모르는 나물은 샌드위치 위에 뿌려져 씁쓸함을 자아냈다.

뉴욕에서 자취를 하며 대학을 다니는 둘째를 위해서 본인이 그곳에 머물며 밥을 하겠다는 시어머니. 자신이 없으면 이십 대 중반이 넘은 아들이 굶는 줄 아신다. 모두 성인이 된 아들들은 다 집을 나가 이제는 먹을 사람이 없는데도 그녀는 계속해서 음식을 하신다. 집안의 모든 냄비가 부엌의 가스레인지와 아일랜드, 식탁을 점령하며 가뜩이나 물건들로 어지러운 집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시어머니가 미국으로 돌아오시자 미네소타에 계시던 시아버지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셨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없던 사이에 시아버지가 여위었다며 직접 개발한 자연식들을 계속 들이댄다. 집을 나온 뒤, 식료품이 떨어졌다고 어머님께 걸려온 전화에 식자재를 사들고 현관에 들어섰을 때, 집안은 온통 먹다 남은 음식과 냄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노인 두 명이 다 먹을 수 없는 그 음식들. 어머님은 통째로 찐 콜리플라워를 손으로 떼어먹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떡에 팥을 빻아 넣어 굽고, 무슨 부위인지 알 수 없는 돼지고기를 무와 함께 물에 삶아 내놓았다. 그녀와 함께 지내던 3일 간, 내가 내놓은 음식은 자취식 요리라며 폄하되었다. 자신이 한 것은 자연 그대로의 음식이기에 몸에 좋고 깨끗한 반면 내가 착즙기로 짠 사과당근 주스는 당이 많아 몸에 좋지 않다고 하신다. 한 집에 두 여자의 살림이 공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넓은 집을 어질러가며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두 분이서 알콩달콩 사실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드리는 게 맞는 선택이었다.

남편과 시동생을 위해 싸준 도시락
늘 신선한 재료로 그때 그때 먹는 내가 한 요리들 (내가 한 음식들이 자취요리란 시어머니의 말씀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시어머니를 피해 집을 나온 후, 나의 삶은 한결 단순해졌다. 고성과 온갖 욕설이 오고 갔던 4일간 파악이 끝났다.


나는 이곳에서 저 분과 함께 살 수 없다.


거의 매일 전화하다시피 하는 엄마에게도 집을 찾던 일주일간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을 아꼈다. 나와 남편이 집을 고치느라 들였던 시간과 돈 노력을 그녀가 알고 있기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걸 알면 속상할 터였다. 엄마는 전화를 하면 시어머니랑 잘 지내냐고 물었고, 힘들게 살아온 분이니 잘 해 드리란 말을 잊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과거사를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이야기했기에 엄마도 그녀의 사연을 알고 있었다. 남부끄러워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이야기들까지 사돈에게 구구절절 전했다는 시어머니의 행동을 엄마에게 들었을 때는 며느리인 내가 다 부끄러웠다. 엄마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생각만 해도 미안하다.


이사가 끝나고 모든 살림살이가 정돈되었을 때, 엄마에게 사실을 말했다. 시어머니가 오신 후 계속 싸움이 있었고, 그래서 집을 나왔다고. 월세를 내지만 그게 마음 편한 일이라고. 나는 괜찮고 사위도 잘 지낸다고. 휴대폰 너머의 엄마는 울고 있었다. 엄마의 눈물엔 시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이런 상황에 처한 나에 대한 연민의 의미가 서려있었다.

“아니 애들이 그렇게 힘들게 고쳐놨으면 고맙게 생각해야지. 자기 멋대로 할거 면 왜 애들을 오라고 했냐고. 자식을 그렇게 힘들게 하는 부모가 어디 있어? 어쩜 그렇게 생각이 짧아!”

엄마는 누구보다 곱고 똑똑하게 키운 첫째 딸이 직장과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두고 미국까지 가서 고생만 하는 것 같아 마음 아팠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자신과 비슷한 인생을 살게 될까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우니 나도 눈물이 났다. 나는 울면서 연신 괜찮다고 했다. 정말 괜찮았는데, 조금 속상하긴 하지만 정말로 괜찮았는데, 엄마의 우는 얼굴은 나를 울게 만든다.


며칠 시간이 지나자 엄마는 따로 살고 있으니 시어머니께 말이라도 따뜻하게 하고 자주 연락드리라고 했다. 같이 있으면 시어머니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며 미운 마음이 쌓이지만 따로 있으니 전화만 해도 덕이 쌓인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엄마에게 늘 내 칭찬을 했다고 했다. ‘며느리를 잘 봤으니 제가 얼마나 복 있는 사람인 줄 몰라요.’ 시어머니는 나에게도 늘 고맙다고 하셨다. 같이 살던 나흘 전까지는 말이다.

“이젠 칭찬 같은 건 안 하시겠네? 집을 나왔으니 엄청 충격받으셨겠다.”

“응 안 그래도 욕까지 하시더라. 조금 진정되고 나니 나한테 복이 없는 사람이래. 하하하.”

엄마는 내가 사랑받는 며느리였으면 좋겠다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안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나 조차도 세상의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없듯 말이다.


집을 나온 지 3주가 지나가고 어머님은 더 이상 연락하지 않으신다. 종종 전화해 우리가 버린 물건이 어디 갔냐, 왜 버렸냐며 소리를 지르셨지만 이젠 그마저도 하지 않으신다. 같이 있던 그때만 해도 어머님이 화를 내시면, 화를 냈기도 했다가, 죄송하다고 빌어도 봤다가 그녀의 감정을 읽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나서 무엇이 필요하냐고 사무적으로 묻는다. 내가 감정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는 걸 읽으셨나 보다.

남편과 부모라는 천륜이 맺어져 있는 이상 나는 시어머니를 계속 보고 만나고 종국에는 모셔야 할지도 모른다. 각오가 되어 있는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은 많이 다르다. 엄마의 시집살이를 보며 어떤 극한이 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또 다른 드라마였다. 나는 언제가 되어야 포용하고 인내할 수 있을까? 각오만 다지는 나는 아직도 한참 모자란 애송이다.


언제쯤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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