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인생의 방향키를 잡고 있나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하기 전까지 시어머니는 한국에 집을 두 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강화도에 작은 빌라, 또 하나는 대구에 쓰러져 가는 주택. 어머님이 어떻게 집을 두 채나 소유하고 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처녀시절, 밤낮없이 일해 마련한 대전의 19평짜리 주공아파트가 적기에 팔려 집 두 채를 마련했을 것이다. 사회에 나와서 월급쟁이 생활만 한 나로서는 그런 어머님의 투자 성공이 놀랍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론 그때의 운이 오늘날 시어머니의 양립 불가능한 경제관념을 만들었을 거란 생각을 들게한다.
이상하게도 늘 그녀는 갈등의 한가운데 서있다. 집을 고치려 사람을 고용하면 그들을 늘 사기꾼이었고, 세입자들 역시 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인간말종 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어머님 버전의 이야기였고, 실제 있었던 일은 달랐다. 한 번은 남편이 자신이 목격한 어머님과 세입자 간의 싸움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곰팡이가 쓴 벽지를 갈아달라는 세입자의 요청에 ‘당신이 그러지 않았냐.’며 스스로 고쳐 살든지 아니면 그냥 살든지 알아서 하라는 어머님의 대응으로 싸움이 났다는 것이다. 당시 세입자는 혼자 사는 50대 여성이었고,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세입자 보다 어렸던 시어머니는 싸움의 끝에 갈등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비방으로 남편은 물론, 세입자의 말문을 막았다고 했다.
“그런 정신으로 사니깐 나이 그만큼 처먹도록 집도 없지.”
그랬다. 어머님에게는 집만 있으면 됐다. 집 없는 모든 이들은 집이 있는 자신보다 늘 모자란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진 집이 아무리 거지 같은 집이라도 상관없었다. 내 이름으로 된 집.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결국 세입자는 나갔고, 시어머니는 다음 세입자를 구했지만 같은 일은 계속 반복되었다.
대구에 있는 집을 고칠 때도, 그 집을 팔고 산 천안 집을 고칠 때도 시어머니는 사람들과 싸우고 또 싸웠다. 정식으로 등록된 인테리어나 시설 설비 업자들을 고용하지 않고,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도 없는 비전문가들을 데려다가 자기 방식으로 일을 시켰다.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인테리어 구상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기에 결코 실현될 수 없었다. 그녀의 바람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상황을 계속해서 맞닥뜨렸음에도 그녀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고 반복했다. 한 번은 동네에서 건달 같은 도급 업자를 데려다가 쓰며 3,000만 원이 뜯겼고, 또 한 번은 자신이 믿을 수 있겠다 싶어서 어떤 사람의 통장에다 1,000만 원을 먼저 넣어주고 먹튀를 당했다. 어쩜 그렇게 사람 보는 눈도 없으신지. 계약서도, 영수증도 쓰지 않았기에 어떤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그녀의 소비에 할 말을 잃었다. 누구도 못 믿겠다며 스스로 고용한 아저씨들과는 늘 싸우며 경찰서에 오갔다. 새집을 지었을 수 도 있을 2억의 돈을 쓰고도 여전히 냉난방은커녕 단열도 되지 않는 집으로 고쳐 놓은 채 냉골에서 덜덜 떨며 사는 시어머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시어머니 통장의 잔고가 텅 비어 있는 걸 보면 그녀의 무지함에 울화가 터진다. 물론 날린 돈이 내가 번 돈도 아니기에 시어머니께 뭐라 할 수 도 없지만 노후 자금 하나 없는 그녀를 나와 남편이 책임져야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쓰레기로 가득 찬 채 어떠한 경제적 가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집과 함께 말이다.
시어머니는 서른 중반 한국을 떠났고 그녀가 사회를 보는 눈은 여전히 80년대의 한국에 머물러 있다. 허름한 자신의 집을 카페로 만들 수 있을 거란 부품 꿈을 꾸고 계시지만 요즘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청결의 척도에 그 집은 들어가기조차 꺼려지는 곳이란 걸 알지 못한다. 게다가 자신이 미국에 있는 6개월간 젊은 아가씨들이 운영할 수 있게 하겠다면 서도 그들에게 줄 임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머님, 요즘 최저 시급이 거의 만 원이에요.”
“그냥 아는 젊은 자매들한테 와서 일하라고 하고, 소품 같은 거 팔리면 수익 몇 프로 주면 돼.”
80년대 처녀시절 발(커튼 같은 인테리어 소품)사업을 할때 아파트 아줌마들에게 일감을 떼어주던 추억을 회상하며 2024년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어머님의 허황된 계획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다.
시어머니를 보며 신기한 점은 늘 고집불통인 것 같지만 어떤 때는 남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동정심의 대상이 그녀의 동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 당황스러울 뿐이지만 말이다. 한 번은 한국에서 어머님과 택시를 같이 탄 적이 있다. 짧은 거리여서 요금은 3,400원 정도 나왔다. 그녀는 5,000원짜리 지폐를 내밀었고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며 택시에서 내렸다. 나는 어머님께 왜 거스름돈을 안 받으시냐고 물었다.
“하루 종일 운전하고 불쌍하잖아. 집도 없을 텐데.”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택시기사님은 어머님의 동정이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는 직업도 있고 돈도 버는 생활인이다. 소득도 없고 직장도 없이 쓰레기 집에 살며 냄새를 풀풀 풍기는 자신이 얕잡아 보거나 안쓰러워할 대상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본다. 남들보다 자신을 우월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동정심으로 발휘되는 것은 아닐까? 그 우월감은 마음속 깊은 곳의 박탈감과 초라한 자아를 감추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왔을 테지만 말이다.
가끔가다 발휘되는 동정심마저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되니 시어머니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달라졌다. 사람을 의심 없이 보는 나는 시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폭풍우 속 흔들리는 가스불처럼 늘 요동친다. 그녀는 좋은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그저 마음이 아픈 사람이다.
시어머니가 자신의 큰 아들인 내 남편을 대하는 모습에서 특히 많은 방어기제를 볼 수 있다. 미혼모로 나의 남편을 낳은 그녀는 남편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연고자’로 부르는데, 그 사람의 폭력성으로 젊은시절 많이 맞았다고 했다. 편모 밑에서 자란 나의 남편은 매일 일하러 나가는 주 양육자의 부재 속에 씩씩한 말괄량이로 자라났다. 으레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남편에게도 욕을 하고 반항을 하는 사춘기가 왔고, 시어머니는 그런 남편에게 유전이 더러워 욕지거리를 한다며 폭언을 퍼부었다. 그녀의 가시돋힌 말들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그녀의 무지는 남편의 자아 정체성을 흔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은 그녀와 살았던 3일간 매일 들었다. “연고자를 닮았다. 나쁜 유전이다.” 그녀는 생각 없이 던진 그 말이 남편에게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줬는지 전혀 모른다. 나는 그것만 생각하면 그녀의 무식함에 치가 떨리고 아무도 몰라줬던 어린 남편의 아픔에 눈물이 쏟아진다. 이제는 덤덤해진 그 말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아이의 마음을 베고 또 베었을까.
아이는 자신의 선택으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세상에 내 던져진 모든 아이들은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밥만 먹이고 재워주는 것으로 아이를 키울 수는 없다. 아이의 마음이 성장하려면 충분한 사랑이 필요하다. 내 남편이 어떻게 오늘과 같은 바른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는 연구해봐야 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서로에게 둘 뿐이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서로에 대한 연민을 기저에 두고 그 이후 서로를 생채기 내는 외부적 관계를 만들어 낸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나는 시어머니의 말과 행동에서 나타나는 여러 불합리성이 과연 어디서부터 왔는지 살펴보려 그녀가 살았던 삶을 밟아보고 이해하려 계속 노력했다. 그럼에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그녀의 사고방식은 다각도의 분석이 필요하다.
정신분석 전문의 김혜남의 책에서 어머님과 비슷해 보이는 양상을 지닌 소설 <인간실격> 속 인물 요조를 발견했다. 자기 내부의 탐욕과 공격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어기제로 ‘투사’를 활용한다는 점이 어머님과 요조의 공통점이다. 인간은 모두 인정받고 싶고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요조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탐욕성과 공격성을 가지고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내재적 욕망과 분노를 상대에게 전가해서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자신을 위험 요소 없는 순수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어머님은 투사와 비슷한 방어적 기제인 ‘투사 동일시’를 활용하기도 하는데 요조의 예를 통해 투사동일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조는 여자를 자극해 놓고 성관계를 가지게 되었을 땐 자신을 여성에게 겁탈당하는 존재로 만든다. 여자가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한 뒤 자신을 선량하고 가여운 희생자,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 어머님 역시 늘 상대가 공격적 성향이 되도록 도발한 뒤, 상처를 입고 피해를 입는 사람이 된다. 그녀는 우리를 자신의 집을 치우고 고쳐준 고마운 아들, 며느리가 아닌 소중한 물건을 버려버린 후레자식의 프레임을 씌운다. 자신을 물건에 손을 댄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비난한다. 세입자에게도 문제를 만들어 싸움을 걸고, 집을 고치는 인부들도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만든 후, 자신을 피해자로 만든다. 자신은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짊어진 사람이고, 어디선가 맞고, 욕을 먹는 피해자라고.
이런 방어적 기제를 활용한 이후에도 시어머니는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회피적, 퇴행적 성향을 보인다. 사회생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집안에 틀어박혀 쓰레기를 모으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열등감은 스스로를 어린 시절로 퇴행시켜 눈에 보이는 뻔하고 유치한 행동들을 하게 된다. 그 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잔인한 세상과 주변인에게 분노하는 사람이 되어 가족들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결국 이 모든 게, 사랑에 대한 결핍이 만들어 낸 결과물 아닌가.
언젠가 자신의 조카를 학대하여 죽인 여성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아왔었다며 오히려 피해자인 척했다. 학대를 받은 그녀의 과거는 안타깝고 가여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 학대를 대를 이어할 것인지, 자신의 선에서 멈추고 학대를 한 아버지를 고소해 사법적으로 엄벌을 내린 후 자신은 아이들을 품고 사랑하는 삶을 살 것인지는 스스로에 달려있다. 그녀가 학대당한 사실이 그녀가 학대로 어린 생명을 죽인 사실을 바꾸진 못한다. 모든 탓을 주어진 환경과 제도, 사회 구조로 돌릴 수 없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다르다. 내가 부모를 고를 수 없듯이 나는 타의로 세상에 나왔기에 부모의 유전자와 부모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은 내가 고칠 수 없는 디폴트 값이다. 애초부터 공평할 수 없는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스스로가 나아갈 방향성을 정해야 한다. 물론 어렵고 힘들겠지만 그 때문에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엄마, 아빠가 그랬고,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살기로 다심하고 자신이 가진 마음의 넓이와 깊이 전체를 사랑으로 채운 사람들 덕분에 나와 많은 이들이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들도 분명 쉽지 않았겠지만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고 실천했다. 시어머니가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다는 걸 알지만 그것이 모든 그녀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시어머니를 동정하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상처를 받은사람이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는 사람 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