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보다는 원망을 택할래
나는 종갓집 종손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은 온갖 친척들로 붐볐다. 명절 차례를 포함해 일 년에 8번 제사를 지냈고, 제사를 지낼 때 아빠는 조선시대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 마냥 하늘색 두루마기를 입었다. 아빠는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자리를 대신해야 했기에 늘 집안의 큰 어른 노릇을 했고 그에 따른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문중 전체를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도 지니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큰 집안의 가장이어서인지 아빠는 어떤 때는 참 독선적이고, 어떤 때는 참 이타적이었다. 종종 그 독선의 대상이 우리 가족이고 이타의 대상이 촌수와 호칭조차 헷갈리는 먼 친척들인 때가 있어 나는 그를 몰래 미워하곤 했었다.
종갓집의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는 딸을 셋 낳았다. 엄마가 선물해 준 두 여동생이 있어 나는 세상 어딜 가도 나를 응원해 줄 그들의 존재에 마음이 든든하다. 하지만 딸만 낳은 탓에 친할머니에게 갖은 구박을 받아 온 엄마의 지난 세월은 글 몇 자로 정리하기엔 너무나 깊은 설움의 연못과 같다. 말도 안 되는 구태에 상처받은 이는 엄마뿐만 아니라 딸들로 태어난 나와 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늘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공부도 잘하고, 행동도 바른 전형적인 K-장녀. 내가 잘해야 동생들도 나를 본받을 테고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 테고, 할머니로부터 인정받을 테니 말이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늘 삶의 방향과 지침을 주는 존재다. 엄마가 시집왔을 때 할머니는 쌍욕을 하며 담배를 폈었고 엄마를 지독하게 괴롭혔지만, 엄마는 욕이나 고성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늘 할머니를 곱게 타일렀다. 엄마의 고상한 대응 덕택에 할머니는 입에 달고 살던 욕과 담배를 끊게 되었다.
‘금쪽같은 내 새끼’만 보아도 아이의 행동교정에 가장 필요한 것이 부모의 인내심이란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건 상대가 귀여운 자녀일 때나 가능하지, 표독스러운 시어머니 일 때 인내심의 강이 마르지 않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를 이뤄냈다. 여전히 잔소리를 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는 92세 할머니를 모시고 아직도 살고 있으니 말이다.
엄마는 가정의 중심이 바로 서야 건강한 가족이 된다며 가장인 아빠를 늘 추켜세웠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시절, IMF 때는 오히려 엄마가 경제적 가장으로서 그 역할을 짊어졌지만 아빠가 기죽을까 늘 스스로를 낮췄다. 아빠 기가 살아야 자신감이 생기고 앞으로 하는 일에도 적극적이고 열정적일 수 있으니 말이다. 엄마는 늘 멀리 내다봤다. 긍정적인 마음이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는 걸 알고 실천하려 했다. 사람의 심리가 작동하는 원리를 배운 사람처럼, 내가 아는 엄마는 늘 포용하고 사랑하고 반겨주는 따뜻한 존재였다. 그 덕분에 나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와 K장녀 증후군을 가졌지만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주변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교육적 측면에서도 엄마는 남달랐다. 초등학교 필수 숙제였던 일기 아래에 엄마는 늘 메모를 남겨 주었다.
“오늘은 친구랑 싸워서 속상했구나, 화해란 아주 어렵지만 늘 얼굴을 보는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엄마가 응원할게. 사랑해”
일기를 검사하는 선생님들은 늘 엄마를 칭찬했다.
“교직생활 20년 동안, 이런 엄마는 처음이에요.”
지방 소도시였던 환경적 여건으로 사교육이 어려웠기에 엄마는 늘 새로운 미디어로 공부에 흥미를 주었다. 영어교육용 디즈니 비디오는 내 어린 시절 최애 프로그램이었고, 오성식 팝스 잉글리시 테이프는 청소년기 나에게 미국팝의 정서와 감수성을 더해주었다. 그렇게 영어에 노출된 나는 중학교 3학년 시절, 전국 영어연극대회에서 금상을 받았고, 수능 영어는 늘 1등급이었다. 나는 나의 엄마가 이토록 완벽한 존재였기에 세상 모든 엄마들이 그런 줄 알았다. 긍정적이며 자기희생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나조차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는 줄 모르는 채 엄마의 품에서 그렇게 자랐다.
‘엄마’란 무릇 완벽한 존재인줄 알았다. 나의 엄마가 그랬기에. 아이를 돌보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필요하면 돈까지 벌고, 그 모든 걸 엄마가 응당 해야 하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럴 순 없다는 걸. 우리 엄마가 슈퍼 우먼이었다는 걸.
남편의 엄마, 나의 시어머니는 강하면서도 유약한 존재다. 80년대 말,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홀로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하고 그 아이를 키워냈으니 웬만한 정신력이 없었다면 이겨 낼 수 없었을 거다. 이후 아버지뻘인 남편을 만나 미국이라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아들 셋을 키워냈으니 어머님 역시 책임감 강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나의 시어머니는 우리 엄마가 아니었다. 자신의 내면적 상처를 가리기 위해 강한 갑옷을 둘러 입었지만 그 갑옷이 몸에 맞지 않아 내부에서 충돌을 일으키며 멍이 들고 있는 사람이다.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배운다거나 운전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건 사회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놓아 버린다는 것과 같다. 시어머니는 집을 떠나지 않았다. 주변인들과의 교류도 없었다. 그저 길가에 누군가가 버린 쓰레기의 상태가 좋으면 그걸 집에 주어다가 모아 놓고, 헌 옷 가게나 중고물품 상점에 가서 쓰지도 않을 물건들을 사다 쌓아놓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 지도 몰랐고 학부모가 참여해야 하는 학교 행사에도 무관심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곳에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을 사람들 앞에 내보이는 게 싫어 ‘학부모 참여는 필요 없어.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하는 걸.’이라는 새로운 갑옷을 꺼내 입었을 거다.
시어머니의 아들들은 돈을 아낀다는 명목 아래에 중학교 때까지 집에서 자른 바가지머리로 학교를 다니며 주변에 놀림을 받았다. 시어머니에게 외모에 민감한 아이들의 정서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다. 그저 밥도 못 먹고살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비교하며 ‘너네는 고생을 덜해서 배부른 소리 한다.’며 아이들의 아픔을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한 번은 시동생의 고등학교 졸업 파티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모두가 양복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가운데, 그만 청바지에 후줄근한 티셔츠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마저도 자신은 사진에 찍히는 줄 모르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옆모습이었다. 그런 그는 자립을 위해 군대에 입대하고 난 후, 뉴욕으로 떠나 그곳의 명문대인 컬럼비아에 다니면서 나와 남편에게만 종종 안부를 전해온다. 어린 시절 모든 추억을 망치고 꿈을 짓밟았던 엄마를 피한 채로. 내 남편은 적기에 여드름 치료를 받지 못해 고등학교 시절 내내 얼굴에 피를 흘리며 학교를 다녔고, 그 때문에 활발하던 성격은 내성적으로 바뀌었고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외모는 필요 없어. 사람이 내실이 중요하지.’ 새로운 갑옷을 꺼내 입는 시어머니. 자식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관심이라도 있다면 쓸데없는 쓰레기를 사다가 모으는데 돈을 쓰기보다 중요한 곳에 썼을 텐데. 그녀는 늘 돈이 없었다는 이야기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한다. 집안 한가득 모아놓은 쓰레기와 함께.
그녀의 무관심과 무지함이 키워낸 결과는 오늘과 같다. 큰며느리인 나와 큰아들은 월세 300만 원을 기꺼이 낼 정도로 크게 데어서 집을 나왔고, 둘째 역시 뉴욕에 간 후, 엄마에게 전화조차 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집을 가는 막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녀 때문에 크게 싸웠고 때마침 그를 목격한 내 친구이자 이웃인 프리티가 나에게 알려주어 그 소식마저 듣게 되었다.
조용할 날 없는 집안을 만드는 시어머니를 보며 나는 나의 엄마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모든 엄마가 엄마 같진 않구나. 나는 엄마를 만나 참 행운아였구나. 나는 참 사랑받는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엄마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어머니의 존재를 두고 엄마는 지난 36년의 세월 동안 자신의 시어머니를 품어왔지만 나는 4일 만에 나의 시어머니를 내던지고 도망쳐 나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마의 교육 탓인지 나에게 남아 있는 양심은 계속해서 시어머니를 돌보라 말한다. 집을 나오기 직전, 가슴이 아프다고 한 말이 떠오르고 당뇨가 있는 것 같다는 자가진단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도 나와 남편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꾀병일지도 모른다. 지난 10월, 내가 한국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한 종합 건강검진 결과 모든 것이 정상이었기에. 그래도 나는 남편에게 자신의 어머니 상태를 확인해 보라고 해본다. 남편도 이제는 정 떨어져 자신의 엄마를 보기 싫다고 하지만 자식과 부모 간의 단단한 인연이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을 거란 걸 나는 안다. 그리고 혹시 잘못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아무것도 안 했다는 후회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를 원망하는 것이 낫기에.
착한 딸은 못된 며느리가 되어 집을 나온 지 한 달이 된 지금, 시어머니께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현재 상황이 편해서 더 이상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결혼한 지 6년이 된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도 어떤 면에서 나와 비슷한 시어머니를 두었고 둘째를 낳고 3개월 간, 막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았기에 그녀의 경험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난 4일 버텼는데, 어떻게 3개월을 같이 살았어?”
“처음엔 진심을 다하려고 가족처럼 대하니깐 힘에 부치더라. 사고방식도 너무 다르고, 막 아기 낳았는데, 시어머니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차려 드리는 것도 힘들고. 정말 손님처럼 큰 감정 없이 대하면서 관계를 놓을 수 있었어.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니까.”
누구보다 마음 넓고 현명한 내 친구의 대답이 가슴에 와닿았다. 모든 걸 포용하려는 순간 괴로움이 더 커진다는 걸 그녀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거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욕심을 버리면 오히려 편안한 관계가 찾아온다. 지금까지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여전히 해독 불가한 그녀. 그녀를 가족보다는 손님이나 직장 상사처럼 대하는 게 건강한 관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손님이나 직장 상사라 하더라도 계속 보는 사이에선 인간적인 유대감은 가지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한 번 다짐해본다.
엄마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세상의 모든 엄마가 아닌 나의 엄마 같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