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깻잎반찬을 먹고서

사랑의 물꼬를 그대에게

by 한양희

작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는 파킨슨병으로 15년 넘게 고생하셨다. 손이 덜덜 떨리는 증상으로 시작된 그 병은 사람의 행동을 굼뜨게 만들다가 어떤 때는 옴짝달싹 할 수 없이 아프게 하고, 발병 후 10년 정도에 치매를 동반하는 지독한 병이다. 손 떨림이 파킨슨의 유일한 증상인 줄 알았던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1년 전, 미국에 와서야 그녀가 달고 다녔던 그 병이 얼마나 그녀를 괴롭혔는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정신과 의사 김혜남의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미국으로 오기 일주일 전, 중국집에서 푸짐한 점심을 먹고 난 후, 외할머니를 끌어안고 작별인사를 했을 때, 그녀는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당신이 살아 있을 줄 모르겠다는 슬픈 말을 남겼다. 영주권 발급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기에 그 말의 무게가 가슴에 턱 하니 얹혔다. 다행히도 7개월 만에 영주권이 발급되었고, 나는 한국 땅을 밟고 가장 먼저 외할머니를 찾았다.

내가 한국에 없던 7개월 동안, 혼자 살고 있던 할머니는 추운 겨울, 마당에 쓰러져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할머니는 저체온 증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엄마와 외삼촌, 외숙모들은 상의 끝에 그녀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오랜 파킨슨 병은 할머니에게 치매라는 친구를 데려왔고, 치매 환자가 된 할머니는 본인도 모르게 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혼자서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치매라는 것은 참 얄궂다. 치매환자가 환자임을 아는데도 환자의 행동에 쉽게 화가 난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니 일반적 잣대로 환자의 행동을 해석하게 되고, 환자는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대며 이상행동을 보이니 의료진이 아닌 가족들은 진이 빠져 지치게 된다. 늘 사랑이 넘치던 외할머니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딸인 나의 엄마를 도둑으로 의심하고, 꿈을 현실로 착각하는 일이 잦아지며, 엄마와 우리 가족 모두가 힘들어했던 시절이 생각난다. 아프기 때문에 그러는 줄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들고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요양사가 하루 한번 할머니 집에 오가던 시절, 나는 할머니 걱정에 2주에 한 번씩 2시간 반 거리의 안동을 오가며 그녀가 잘 있는지, 아프진 않는지, 식사는 잘하시는지 살펴보곤 했었다. 그때도 울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엉뚱한 소리를 하시며 속을 썩이다가도 언젠가 돌아오는 또렷한 정신으로 손녀의 머리와 어깨를 쓰다듬던 그녀의 따뜻한 품이 여전히 그립다. 정신없는 할머니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었던 건, 그간 그녀가 우리에게 베푼 사랑,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희생 때문이다.


외할머니가 요양원에 계시던 7개월 동안 식구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할머니 면회를 갔다. 가장 가까이 사는 외삼촌들은 이틀에 한 번씩, 차로 한 시간 반 떨어진 엄마는 일주일에 두 번씩, 한국에 있는 손녀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미국에 있던 나는 총 세 번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24시간 돌봐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안도감에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긴 했지만, 자유 없이 시설에 갇힌 그녀는 날로 여위어 갔다. 풍채가 좋던 할머니는 자그마한 노인이 되어 휠체어에 앉은 채, 흘러가는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이후 압착성 허리골절로 노인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는 불과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가시기 직전 병원으로 면회를 갔을 때, 그녀는 초롱같이 맑은 정신으로 나를 알아보셨다. 멀리서 온 손녀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던 할머니.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임종 면회를 하면서도 나는 그녀가 그렇게 우리를 떠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다시 미국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다가 아빠에게 온 전화를 받고 급히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고생만 하다 가신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빚은 인생의 씨앗이 남아 있는 우리의 마음에 심겨 싹을 틔웠다. 자식에게만큼은 가난과 고생을 대물림하고 싶었지 않았던 그녀. 그녀의 희생으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나와 내 가족들은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시어머니께 그런 어머니가 있었다면 그녀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을 거다. 똑같이 어려운 시절, 가난한 집에서 자랐지만, 우리 엄마는 자식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 사랑을 주는 엄마를 가졌고, 시어머니는 사랑은 많았지만 병약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셨다.


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는 엄마와 삼촌들은 물론, 손주들에게 까지 물려 내려오는 거대한 사랑을 전해 주셨지만, 우리 시어머니의 엄마는 자신이 낳은 세 딸이 다 크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지금 나 보다 어린,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 없는 세상에서 큰 시어머니가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하길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학원 한 번도 안 보낸 아이를 서울대 의대에 보내길 바라는 마음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내 남편과 시동생들을 키운 것만으로도 칭송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처녀 적 그녀는 잘못된 선택으로 미혼모가 되었고, 이후 아버지뻘의 남자를 선택하면서 미국에 와서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며 사람과의 교류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시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고, 가난하고 늙은 남편과 살고 있으며, 미국에 살아도 영어를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초라해 큰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모은 소품들을 팔아다 부자가 될 것이라는 자신감 말이다.

나의 시어머니는 자신의 엄마로부터 열세 살의 어린 시절까지 받아온 그 사랑에 의지해 삶을 뚫어왔다. 열세 살에 엄마를 여읜 그녀가 세상을 보는 눈은 열세 살에 머물러 있다. 머리가 좋고 수완이 좋아 한때는 작은 사업에도 성공했고, 운 좋게 싼 값에 집을 사 비싸게 판 경험이 있어 경제적으로 뭔가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밥 먹고, 잠잘 수 있는 집을 마련하는 것 외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은 모르는 채 살아왔다. 내 남편은 ‘연고자’를 닮았다는 이유로 ‘유전이 더러워 그렇다’는 폭언을 12살 때 무렵 부터 들었고, 식구 모두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음식들을 먹으며 살아왔으며, 친구를 사귀거나 공부를 하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활동들은 늘 뒤로 밀려나 있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내 남편과 시동생들이 각자 알아서 자신들이 먹고살 거리를 찾아냈다는 건 정말 기적에 가깝다.


시어머니의 물건에 대한 집착과 저장강박, 그 외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폭력적 언사와 우울증, 이 모든 것은 의사로부터 진단받진 않았지만 마음과 정신의 병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를 아픈 사람으로 인식한다. 삶이 그녀에게 준 상처가 심해 마음이 곪아있는 사람에게서 따뜻함과 친절함을 기대하기란 힘들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늘 친절하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집을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얼마나 복이 있는지 나처럼 착하고 예쁜 며느리를 얻었다며 늘 칭찬하고 다니셨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은 아들, 며느리 복도 없다며 문자로 욕을 보내고 계신다.

마음에 병이 있는 시어머니를 이해하고 보듬는 것이 식구로써 취해야 할 태도지만 사실 쉽지만은 않다. 나에게 엄청난 사랑을 준 외할머니조차도 치매 때문에 죽은 삼촌이 돌아왔다거나, 방안에 누군가 있다거나 하는 엉뚱한 소리를 하면 ‘아, 우리 할머니가 아파서 그렇지.’라는 생각 보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없어요.’하며 그녀를 고쳐주기에 바쁜 나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치매 환자에게 남아있는 것은 기억, 인지능력 보다는 ‘감정’이기에 아니라고 핀잔을 주고, 짜증을 내며 틀린 말을 고쳐주기보다는 그녀가 겪고 있는 감정에 공감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할머니가 외갓집에 홀로 살던 그때, 나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정보 전달을 위해 얼마나 그녀의 말을 고치고 인상을 썼던가. 엄마가 할머니 죽이려 하는 게 아니라고, 요양사 아줌마가 삼촌이랑 바람이 난 게 아니라고, 할머니 몰래 통장에서 돈을 뽑아가려는 게 아니라고, 아니라고만 말했던 그때. 다 지난일들은 후회로 남는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외할머니도 병이 정신을 갉아먹을 때 모든 걸 포용하지 못했는데, 시어머니라는 존재에게 바다와 같은 넓고 깊은 이해심을 갖는 건 정말 어렵다. 사랑을 Give and take,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딱히 시어머니께 줄 사랑이 없다. 그녀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냉담함을 냉담함으로 되갚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니 말이다. 외할머니가 엄마와 나에게로 전해 준 사랑은 대가를 바라고 준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주는 사랑, 계산 없는 무한한 사랑이었다.


나는 오늘 그 사랑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깻잎반찬에서 찾았다. 어찌된 건지 이번에 한국에 도착하니 동생네 집 냉장고에 있었다. 적어도 10개월 전쯤, 꽤나 오래 전에 만든 반찬이었을텐데 상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잊고 있었던 맛이 입안과 콧속을 채우며 할머니의 손맛을 느꼈다. 그리고는 할머니를 떠올렸다.


그 사랑 덕에 내가 크고, 남편을 만나 또 다른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와 묶여온 원 플러스 원(1+1)에게도 그녀가 받아 보지 못한 사랑을 전해주려 한다. 어쨌거나 남편과는 떼어버릴 수 없는 사이. 모자가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 엄마가 지난 37년간을 친할머니와 함께 살았을 거라 생각한다. 측은지심과 함께 외할머니가 전해주신 사랑으로.


처음엔 물론 사무적일 거다. ‘어머님, 잘 지내셨어요? 건강은 어떠세요?’라는 전화로 시작되겠지. 어떤 때는 욕을 한 바가지 먹고 마음이 상해서 한동안은 연락조차 안 하기도 할 테지. 그리고 또 어떤 날이 오면 찾아가서 얼굴도 보겠지. 나중에 시어머니가 병들어 홀로 생활할 수 없을 때가 오면 더 자주 찾아뵙고 종국에는 내 돈을 들여가며 요양원에 모시겠지. 사랑의 물줄기가 강처럼 크게 뚫려 넘치진 못하더라도, 마르지 않는 냇물처럼 그런 사랑을 시어머님께 전하려고 한다. 집을 나오던 당시, 분노에 휩싸여 어리석었던 내가 모자간의 인연을 끊는 것과 같은 극단적 선택지를 옵션에 두었다는 것을 조용히 고백해 본다. 부디 내 마음이 늘 오늘과 같기를 바라며 내일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려야겠다.






엄마가 외갓집 김치냉장고를 정리하며 외할머니가 만들어 둔 깻잎 반찬을 찾아왔다. 미국에서 4개월간 고친 집을 나오고 마음의 위안을 받고자 한국에 일주일간 방문한 나에게 엄마는 그 귀한 반찬을 양보했다. 향긋한 들깻잎 켜켜이 알싸한 마늘 냄새가 가득한 할머니의 비법소스가 버무려진 그 반찬을 먹으며 나는 할머니를 떠올렸다. 살아생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던 할머니가 아직도 옆에 계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아름다운 글이다. 시고, 노래고, 붉은 동백이다.


인생에 때때로 힘든 시기가 오면, 나는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고추를 이고 밤의 산골짜기를 넘을 때, 무섭고 힘들지만 가족을 생각하며 노래를 불렀다는 할머니. 그녀의 인생 앞에선 내가 겪는 문제는 밤톨 만해지고 나는 곧 숙연해졌다. 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용기를 가진다. 나에겐 할머니의 사분의 일이 들어있으니 할머니의 용감함과 의연함이 내 몸과 마음에도 담겨 있으니, 나도 무엇이든 잘 헤쳐 나갈 수 있다고. 할머니처럼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부디 그 사랑이 나를 넘어 나의 시어머니에게도 전해 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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