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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조셉 Sep 12. 2020

셋째가 갖고 싶다

나만의 욕심인가

느닷없는 셋째 욕심이 생겼다. 지금 둘째가 120여 일인데 그런 미친(?) 생각의 시작은 둘째가 50여 일 때부터였다. 둘째가 너무 편해서였을까, 둘째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면 풋풋한 아기 냄새, 해맑은 웃음.. 그 지나가는 모든 시간이 아쉽다. 또한 올망졸망 딸을 한 번 못 가져 본 것에 대한 어떤 여한이랄까... 하루에도 '가질까' '아니다. 그만하자' 두 사이를 수백 번 오가고 있다.

사실 결혼을 하기 전부터 우리 둘의 목표는 세 명의 아이였다. (첫째를 키우면서 그 계획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에 둘이 격하게 동감하긴 했어도..) 연애시절에는 셋째는 입양으로 키워보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꿈도 함께 가졌었다.

나의 진지한 이런 고민 상담에 남편은 단번에 "Non"이라 했다. 마흔이 되기 전에 (마흔이 넘어서까지 입덧과 출산이며 나 홀로 산후조리 - 엄두가 안 난다) 세아이를 키운다 치면 나에게는 4년이란 시간이 남았고 이는 내게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의 말인즉슨, 이미 아들 두 명이면 할 일을 다 했고 본인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나 그리고 그간의 육아 고충 등 이미 본인은 충분히 겪을 만큼 겪었다는 거였다. 예상했던 답변이지만 그의 입을 통해 들으니 못내 서운하긴 했다 -  부인이 이렇게 매달려서 아이를 낳아준데도 싫다는 저 심보는 대체 뭘까.


사실 첫아들 그리고 둘째 아들 둘 다 나의 치밀한 계획(?)과 거듭된 설득으로 두 아이가 이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이서 더 신혼을 즐기다가는 이대로 마흔 살이 되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주변 난임 커플들의 이야기를 듣으니 갑자기 불안감이 언습해왔다. 그렇게 무턱대고 시작했던 첫 시도에 내가 덜컥 임신이 된 것이다. 그때가 남편을 만나 프랑스로 거처를 옮겨와서 취직이 되어 커리어를 쌓고 있을 시절, 프랑스 생활 2년 차였다. 일도 하고 나름 돈도 어느 정도 벌고 무엇보다도 프랑스어 때문에 많은 선택지가 없던 나로서는 어떻게든 그 회사에서 버텨야 하는 때였다. 당시 계약직이었던 내게 계약을 더 연장해줄 수 없다는 회사의 냉랭한 답변이 돌아왔다. 임신 7개월 차..  안 그래도 대우가 시원찮은 회사에 목을 매고 다닐 생각이 없던 나로서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아기나 키우지 뭐' 

하나 남편은 회사에 다니면서 차차 프랑스어를 보안해서 이직을 하자는 주의여서 계약 연장이 결렬된 데 대해 못내 아쉬운 모양새였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겐 무엇보다 당장에 아이가 태어나서 키울 집이 필요했다. 단칸방에 알콩달콩 살던 신혼은 이제 빠이빠이 였다. 아기가 우리에게 옴과 동시에 모든 게 현실이 됐다.




그는 단칸방이지만 있을 거 다 있는 아파트에서 아기자기하게 혼자만의 삶을 만끽하며 살던 남자였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사진 찍는 취미가 있는, 여행을 좋아하는 꿈 많은 남자였다. 남편에게는 한국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 당시 (프랑스 지사의)  직장 동료였다. 나는 퇴직기념 파리로 2박 3일로 놀러 가게 되었고 동료의 천으로 교회 바자회를 갔다. 그곳에서 남편을 보았다 - 첫인상부터 영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횡단보도 저편으로 멀끔한 한 남자가 서있었는데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던 그를 처음 보고 나는 '나와는 이생에 인연이 없겠거니' 했다. 그 당시에 내가 남자를 볼 때 처음으로 보는 기준이 흡연 여부였기 때문에 그는 바로 탈락이었다. 이후에 독일로 돌아와서 그 동료에게 프랑스 친구가 내게 관심이 있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독일 - 프랑스 우리가 다른 나라에 사는데 과연 잘 될 수 있을까?' 했단다. 나는 한편으로 기분이 좋았지만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사랑한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가야지' 도전 정신이라곤 제로인 저 남자를 내가 제대로 다시 봐야겠다 해서 오기로 파리를 또 찾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의 첫 번째 데이트가 되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롱디 커플로 지내다가 나는 독일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프랑스로 갔다. 7여 년 간에 독일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이나 친한 언니들, 그 익숙한 삶을 뒤로하고 말이다. 그렇게 저편에서 담배를 뻐끔뻐금 피워대던, 이 생에 인연이 없을 것 같던 그 이와 나는 결혼반지를 나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생겼다.




"넌 애들 다 키우면 뭐하고 싶어?"

"취미생활."

"취미 없잖아?"

"왜 없어? 나 사진 좋아하잖아"


그래...

사진 찍는 거 좋아하던 이 남자를 내가 과거에 묻어두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기만을 바란 건 아닐까. 오랜 남편의 취미생활을 잊고 있었다. 머리에 돌 방망이 하나 맞은 듯하다.

셋째는 내 욕심인가 보다. 한 3년만 고생하면 귀여운 입으로 말도 하고 학교도 가고.. 육아가 좀 편해진다고 생각하니 그깟 3년 또 하지 싶었다. 그런데 그의 소중한 삶도 생각해야 되지 싶다. 그리고 물론 내 삶도 되찾고 말이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여자로서의 삶도 그리고 못다 한 꿈도 마저 이뤄야 하고. 예전에 만들어 둔 구체적으로 원하는 집 모양이며 갖가지 위시리스트 등 덕지덕지 스크랩된 그 종이를 보노라면 동기부여가 된다. 그 꿈의 조각 퍼즐을 맞춰가야지.

그리고 남편과 함께 노후를 멋지게 재미있게 보내야지. 행복하게 우리 오래도록 같이 살자! Je t'aime, mon co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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