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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조셉 Sep 17. 2020

엄마의 마음

이제는 알 것도 같다.

2006년 교환학생으로 독일을 가게 되었을 때, 그렇게 긴 기간을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 부모님과 떨어져 본 게 처음이었다. 1년을 계획하고 갔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다 마치지 못하고 집안 사정으로 인해 6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그때만큼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거 같다. 어렸고 남다른 패기도 있었고 똘끼 있고 꿈도 많았던 시절... 처음 밟아보는 독일이란 땅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나라였다. 그렇게 6개월의 교환 학생 시절을 보내고 소위 말하는 "외국병"에 걸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 독일병이란 게 한참을 갔다.

대학교 4학년, 모든 취준생들이 토익을 붙잡고 있을 때 나 혼자 독일어 시험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취업준비로 열띤 스터디를 하던 중에 나는 어떻게 다시 독일을 갈 수 있을까 통밥을 굴리고 있었다. 그때 부산시가 후원하는 '외국으로 인턴을 보내기' 프로그램을 우연히 알게 되어 어마어마한(?) 경쟁을 뚫고 내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관광공사에 3개월 인턴을 가게 되었다. 가족은 어차피 돌아올 거 독일 가서 허파에 바람만 잔뜩 키워온다고 만류를 했지만 나는 갔다 와서 열심히 취업 준비를 하겠다는 공수표를 날리고서야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살아남겠다는 각오로 보란 듯이 편도 티켓을 당당하게 끊었다.

가기 전 열심히 알바를 해서 모은 200만 원을 손에 쥐고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그때 김해 공항에서 눈시울이 붉어진 엄마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엄마의 마음을 못 헤아린 것은 아니지만 그때 나의 독일병은 아무도 말릴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 당장은 내 꿈이 더 중요했다.


"금방 돌아오너라."

"...... 갈게! 안녕! "


그때 엄마는 돌아서서 가는 나의 뒷모습을 보고 3개월이 아니라 더 있게 될 수도 있겠다 짐작을 했단다. 그래 그 3개월이 장작 지금까지 12년이 되었으니 말이다. 엄마의 무서운 직감이란..

 

3개월 아니 더 버티려면 200만 원을 잘 관리해서 써야 했다. 집에 지원금을 요청해달라고 하면 다시 돌아오라는 볼멘소리를 할 것이 뻔해서 어떻게든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됐다. 아침과 저녁은 까몽베르 치즈가 올라간 베이글 빵 하나로 버텼다. (그때 매일같이 너무 물리도록 먹어서 지금도 난 까몽베르 치즈를 별로 안 좋아한다) 점심은 조선족이 운영하는 뷔페식당을 매일 갔는데 맘껏 먹고도 6.90유로라 내게 딱 맞는 식당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함께 일하는 매니저 언니가 하고 많은 한국 식당을 놔두고 왜 맨날 뷔페냐 했지만 내겐 1~2 유로가 아쉬우니 어쩔 수 없었다. 하루는 그 매니저 언니가 나의 사정을 알았는지 집에 초대를 해서 나에게 저녁으로 따끈한 강된장을 차려주었다. 고봉밥으로 두 그릇을 먹었는데 지금도 그 따끈한 고봉밥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독일과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 걸까.

관광공사 인턴 3개월 프로그램 시작 전에 뿌려두었던 이력서를 보고 몇 군데 회사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취업비자를 변호사를 선임하여해 준다고 하는 가장 신뢰가 갈 만한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다. 당시만 해도 취업비자받은 일이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던 시절이다. 비자를 기다리는 3개월 동안 심장이 타들어 갔다. 엄마와 통화에서 애써 태연한 척 얘기했지만 엄마는 딸의 마음을 잘 아는지 3개월을 비자가 무사히 나오길 함께 마음 졸이며 빌어주었다. 그리고 비자를 받고 눈에 그리던 독일 생활이 시작되었다.


" 그래도 1년만 있다가 돌아와, 알았지?"

"난 여기가 좋아. 평생 살 거야"

"......"


그렇게 철이 없었다.

그땐 내 꿈이 무조건 중요했다.

딸 하나를 멀리 이국땅에 둔 엄마의 걱정 따위 안중에도 없던 시절이다.



2016년 10월 1일 남편과 나는 부산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저녁 광안리 어느 맥주집에서 앞에 앉은 시어머니와 맥주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대뜸 하시는 말씀이,


"너희 어머님은 대단하신 분이야."

"왜요?"

"하나밖에 없는 딸을 먼 나라에 두고 어떻게 그리움을 참으신다니? 나라면 못했을 거야" 


그때 어렴풋이 알 거 같았다. 엄마의 마음을. 어느 때부턴가가 엄마와의 통화에서 "언제쯤 돌아올 거니?"라는 물음이 사라졌다. 엄마는 체념을 하고 계 신중이었다. 그리고 내 결혼식에서 남편에게 하나뿐인 딸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거 같다는 말을 내게 했다.


가족끼리 도란도란 저녁상에 모여 앉아 삼겹살을 구워 먹는 일, 엄마와 팔짱 끼고 남포동을 누비며 쇼핑을 하는 일도 내겐 요원한 일이 되었다. 엄마의 갱년기 때도 난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못난 딸이 됐다. 경상도 딸내미의 무뚝뚝한 표현에도 엄마는  항상 밝다. 온갖 짜증 섞은 말투에도 엄마는 묵묵히 내 말을 들어줄 뿐이다.


내가 자식을 낳아보니 이젠 잘 알 거 같다. 얼마 전 둘째가 태어나고 첫째가 시어머니 댁에 일주일 동안 가 있게 되었다. 해맑게 웃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아들을 보며 나는 눈물이 찔끔 났다. 언젠가 아들이 멀리 공부를 하러 떠난다고 하면 나도 공항 한편에서 목놓아 울지도 모른다. 그냥 하염없이 서운할 거 같다.  그게 현대판 올가미라 할지언정 멀리 사는 아가씨를 만나  1년에 아들 얼굴을 볼까 말까라면 며느리가 얄밉고 그럴 거 같다. 난 쿨한 엄마는 아닌가 보다.

내가 꿈을 좇아 내 살길 찾아갔던 그 냉정함을 아들들은 덜 닮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일 부산에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

그리고 모처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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