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 올려 묶은 머리에 무릎팍이 돌출된 파자마가 요즘 나의 홈패션이다. 첫째 아들이 대낮에도 파자마를 입은채로 집을 돌아다닌다고 내게 핀잔을 주지만 피자마는나의 잠옷이자 육아 출근복이다.한참 침 흘리는둘째를 늘상 안고 있다 보니 우유 자국이 묻은 채로 스레빠를 끌고 첫째 학교에 가는 일은 예삿일이 되었다. 그렇게 허연 자국이 묻은 채로 길을 활보하고 다니어도 나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다는 게 더 충격이지만 말이다.
출산을 한 지 4개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나의 몸에 남아있는 5킬로는 이제 나의 평생 동반자로 살 모양이다. 정녕 이젠 아줌마이다. 탄력 잃은 뱃가죽에 매일 계속되는 수유에 거북목이 더해졌다. 허나, 당장 6개월까지는 모유 수유 때문에라도 당분간은 이 모습 그대로 있어야 될 거 같다. 뭐. 거울 앞만 잘 피해 다니면 그래도 큰 죄책감은 없으니까.
언제 엄마가 아닌 오롯한 나로 다시 복귀가 가능할까. 5년? 10년?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아줌마로 남을 수 있을까?
아기를 낳기 전에는 난 힐을 좋아하는 여느평범한 여자였다. 쭈욱 빠진 다리에 각선미를 더해주는 마법 같은 힐을 나는 좋아한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걷는 모양새에 그리고 섹시하게 흔들리는 골반은 여성미를 더해준다. 옷을 잘 못 입더라도 힐은 꼭 신어야 하는 게 나의 20대 공식 같은 거였다.
첫째를 유모에게 맡기고 지금 다니는 직장에 취직이 되어 다시 힐을 신어봤던 기억이 난다. 어정쩡한 걸음걸이에 남의 옷을 입은 듯한 어색한 복장 차림은 '나 방금 복귀했소'라며 갗 육아를 마치고 나온 모습 같았을 거다. 높은 힐을 신고도 착착 걸어 다니는 화려한 파리지엔들 사이에서 나는 마흔이 넘어도 여전히 여성미 뿜뿜 풍기는 여자로 남고 싶다 처음으로 생각했다. 힐은 곧 내게 20대 젊음 같은 거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 힐들은 구두코 위에 먼지가 소복이 쌓인 채 신발장에 처박혀 있다. 언젠간 꺼내어 다시 신어 볼 날이 오겠지.
나는 마흔이 기다려진다.
누군가 내게 20대로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냥 이대로가 마흔을 맞이하겠다 말하고 싶다. 나의 20대는 찬란하다기보다는 끝이 안 보이는 터널 같은 거였다. 풋풋한 모습 뒤에는 빨리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방황하는 20대가 다 그러하겠지만 IMF 이후 세대인 나로서 20대는 젊은 방황보다 폭망 한 집안의 안정이 더 우선이었다. 2살 위 터울의 오빠나 나의 학업이 무리 없이 잘 마치는 것이 우리 부모님의 바람이었고 얼른얼른 취직하여 집안에 보탬이 되는 것이 마치 모두의암묵적 동의 같았다.
불행했느냐? 그렇지 않다.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엄마와 단칸방에 살았어도 난 마음은 늘 편안했다. 누구 하나 아프지 않고 이 상황을 우린 잘 헤쳐나갈 테니까. 애써 괜히 멜랑꼴리 해지지 않으려 했다. 그때 대한민국의 거의 많은 집안이 다 그랬으니. 옆집 602호도 건너 201호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걸 회복하는데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나는 20대는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30대를 맞이했다. 슬프지 않았지만 20대 꽃 같은 나이를 너무 열심히만 살았다는 아쉬움은 있다. 학교 다니는 동안 과외도 열심히 해서 학비도 마련하고 사랑이란 것도 간간이 해보고 독일로 떠나와서 이래저래 정착하느라 바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젠 프랑스가 나의 삶이 터전이 되었다. 어느 빵집 바게트가 맛이 있고 어디 공원이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지 머린 어디서 자르는 게 그나마 잘 자르는지 등등. 풋풋했던 20대 보다 지금 이 상태로 편안한 40대가 좋다. 갈 길이 멀고 아직 난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이젠 혼자 열심인 인생이 아니라 같이 인생을 즐길 가족이 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고 들려줄 얘기도 많다. 내가 어렸을 때 다니던 떡볶이 집이며 시장통 구수한 파전 그리고 광안리의 모레 사장, 해운대 동백섬 - 푸른 바다 앞에서 꿈을 키웠던 그런 소소한 얘기들과 함께.
조만간 지금 홈패션을 졸업하고 다시 힐을 신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학교에 아들을 찾으러 가야지. 여전히 꿈 많은 멋진 아줌마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