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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조셉 Sep 22. 2020

할머니에 대한 기억

"그래도 니 할머니잖니"

둘째를 낳고 엄마가 프랑스로 아기를 보러 못 오는 것이 못내 서운했다. 코로나가 판을 치는 이 마당에 나이 70 이 다되어 가는 엄마가 장작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오시는 게  걱정되긴 했지만.. 나 혼자 어떻게든 버텨낼 근거 없는 자신감이 어느 정도는 있었나 보다. 그래도 1년 만에 볼까 말까 한 엄마 얼굴 못 보게 되니 아쉽긴 하다.


의사 말이, 할머니가 연세도 있으시고 하니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된데


엄마의 말 한마디에 내가 마음을 접기로 했다. 할머니는 아흔을 넘기시고 이제 기력이 다해 조만간 준비를 해야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맏며느리인 엄마가 자리를 비우기는 더욱 어려울 터.




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다.

사실 좋은 것보다 싫은 것이 더 많다.


우리 집은 사촌이 나를 포함해 6명이 었는데 그중 2살 터울 위인 우리 오빠가 장손이었다.  그리고 제일 꼬맹이가 아들 그리고 중간은 4명은 여자들이었다. 할머니의 찐 사랑은 단연 우리 오빠였다. 분명 우리 집에서는 차별이란 게 없는데 해운대 할머니 집만 갔다 하면 오빠와 나의 차별은 어린 내가 보아도 느껴질 정도였으니 어렸을 때부터 그에 대한 반감이 아주 컸다. 내가 배우는 교과서 책에서는 남녀가 평등이라고 하는데 왜 자꾸 할머니 집에서는 남자 여자 상도 따로 차리고 숙모들을 포함한 여자들만 늘상 일하고 남자들은 편안하게 앉아서 과일을 깎으라고 하는지 게 평등인가- 이해가 안 갔다. 해운대 할머니 댁을 갔다 오는 날은 댓발 나와 있는 내 입과 함께 손에항상 작은 선물이 들려있었다. 엄마 아빠가 어린 나를 달랜다고 근처 백화점에서 어떤 거라도 사야 했었으니 말이다.


한 번은 아빠를 포함한 어른들은 큰집에 제사를 모신다고 떠나고 할머니 그리고 고모, 사촌들만 남아 있는 추운 겨울 일요일 오전이었다. 여자 사촌 여자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그 차별이란 걸 못 견뎌하고 할 말 안 할 말 조목조목 다 하던 바라진 아이였다. 그날도 내가 무엇 때문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이미 마음이 상해서 울고 있었고 오빠가 내 편이 되어 할머니께 한마디 던진 게 화근이 됐다. 그때가 아마 내 나이 10살 즈음이었을 거다.


제 동생한테 그러지 마세요! 저도 그럼 할머니 싫어할 거예요!


우린 추운 마루에서 등 돌리고 돌아앉아 시위를 했고 할머니는 세상 떠나가라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고모는 어린 너네들이 그러는 게 아니라며 역정을 냈다. 특히나 장손인 오빠가 할머니께 그러면 안된다며 딱 잘라 말했다.

나중에 어른들이 도착하고 우린 나이 든 할머니를 울린 죄인이 됐다.  고집불통에다 오빠를 선동시킨 아이가 되었다.


엄마는 우리에게 할머니 얘기를 잘 안 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그리고 우리가 자라는 동안 그 과정들이 어떠했는지 말이다. 사소한 에피소드는 이모를 통해 들을 일이 많았는데 엄마가 맏며느리로 들어와서 손이 부르트도록 상 차리기를 했던 것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첫째 아들인 아빠와 그 밑으로 장가 안 간 두 삼촌 그리고 고모 - 식구만 어마어마했을 텐데 좁은 부엌에서 허리도 못 피고 일만 했던 엄마는 시집가기 전에 집안에 사랑받는 막내딸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약했던 엄마에게 외할머니는 귀하디 귀하다는 바나나를 몰래 이불속에 넣어주고 했단다.

난 그래서 더 할머니가 싫었다.

그런데 아빠는 맨날 어린 내게 니가 할머니를 이해해라 했다.


그래도 니 할머니잖니.




독일로 정착을 하고 8월 제사를 모실 때에 모처럼 한국을 갔다. 제사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는데 손이 많이 드는 걸 내가 알기에 이번에는 엄마를 명절좀 편하게 해 드리자 해서 더운 8월에 한국을 갔다. 삼촌들도 모이고 할머니가 집에 도착하셨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신 할머니는 옛날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절을 올리고 상을 차리려던 도중 할머니는 내게 다가와 다정하게 손을 잡으시며 한마디를 하셨다.


"나는 니가 그래도 ㅎㅎ가 더 좋다."


'오빠가 더 좋다는 말을 설마 내 앞에서?'


"엄마 노망났는교!"


잘못들은 건가 어안이 벙벙했을 때 막내 삼촌의 되받아치는 한마디에 나는 제대로 들은 게 맞다는 신호가 뇌에 잡히는 걸 느꼈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제사상 제기를 닦고 계셨다. 막내 삼촌은 딸만 둘이라 아마 그런 할머니가 더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그놈의 고추 하나 안 달고 세상에 나온 게 지금까지 이래야 되나 싶었다.



독일에서 매해 한국을 갈 때도 시차 적응 못하고 잠이 쏟아지던 와중에도 할머니 요양원 방문은 꼭 갔다. 짧은 일정으로 못 가게 되면 전화라도 꼭 드렸다. 이 모든 것은 할머니가 우리 아빠 엄마이기 때문이지 내 할머니라서 한 일은 아니다. 내가 고집 피우면 아빠도 속상해할 테니까 그냥 하자 하는 마음에서 했다. 고집 피운 건 어렸을 때 한 걸로 이미 족하니까.


할머니가 이 세상을 떠나시게 되면 70이 넘은 아빠가 많이 힘들어하실 거 같다.

내 마음은 그저 담담할 텐데.

내 마음은 그저 아주 담담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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