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에 한국을 떠나온 나는 늘 불효녀의 마음으로 살았고 지금도 그런 마음이 한켠에 있다. 독일병이 걸려 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제멋대로 떠나온 한국은 이제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먼 나라가 되었다. 20대야 체력이라도 받쳐주니 한국을 3~4번도 거뜬히 다녀왔지만 지금은 어린 아들들 사이에 한번 가는 거 조차 버거운 일이 됐다.
엄마 옆에 지금까지 내가 있었더라면
난 엄마한테 빽빽 데는 지랄 같은 딸이었을 지라도 명절날이면 도란도란 마주 앉아 생선전도 같이 굽고 국도 같이 끓였을 텐데.더운 여름 제사 때마다 불 앞에서 땀 뻘뻘 흘릴 엄마에게 사뭇 미안한 마음이 많다. 얼마 전 추석을 보내고 대상포진이 걸렸다는 엄마의 말이 듣고 이제 엄마도 나이를 드는구나 실감하게 됐다.
엄마가싸움닭이 되어가는 동안,
가슴에 불한덩이가 끓어올라
답답한 마음 어디 풀데 없어 홀로 씩씩거리는 동안,
얼굴이 더웠다가 식었다가 하는 그런 갱년기를 겪어 내는 동안,
엄마 딸인나는 독일에 있었다.
오빠랑 이제 말 안 할 거야. 내 삶에 간섭 좀 그만하라고 해. 난 나대로 살 테니까.
20대 혈기왕성한 나이,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독일에 왔고 경제적으로도 독립도 하고 내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는 시건방 떨던 시간들이 있었다. 홀로 멀리 있었기 때문에 가족이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거였지만 그게 그때는 말 한마디 마디 정말 지겨운 잔소리처럼 귀에 꽂히는 게 정말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그중 유독 오빠랑 부딪히는 일이 많았는데 처음부터 내가 독일을 가길 바라지 않던 사람이라 그 반감은 더 컸다.
전화기에 대고 오빠와 나 사이에 낀 엄마한테 실컷 화풀이처럼 애뭉한소리를해대고 있는데 전화기 너머로 엄마가 말이 없다. 그리고는 엄마가 갑자기 흐느껴 울었다.
너희 둘 한 형제가 우애 좋게 잘 지내야지. 나중에 엄마 아빠 이 세상에 없거들랑 어쩔라고 니는 그렇게 독을 품은 소리를 해대노
딸의 지랄 맞는 성격을 다 받아주던 엄마가 때아닌 맞불작전을 두자 원래 그러지 않던 엄마라 난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흔히 볼 수 없었던 엄마의 눈물.
가슴이 헛헛해져 왔다.
엄마 눈물 앞에서는 난 늘 죄인이다.
무릎 꿇고 납작 엎드려도 모자를 죄인이다.
후에 그 기억이 너무 뇌리에 박혀서 한동안 가슴통을 울렸다. 왜 그랬을까.
배여사님이 왜 그땐 그렇게 반응했을까.
그때 엄마는 갱년기였다.
후에 그 날 전화로 소리치던 그 일은 기억이 안 난다며 엄마는 털털 웃어넘겼다. 그리고는 아찔했던 3년의 갱년기를 겪었다고 말했다.
나도 그즈음 독일에서 우울증을 앓았다. 엄마처럼 3년이라는 긴 세월은 아니었어도 비록 내 우울감은 두어 달 만에 가까스로 회복이 되었지만 어렴풋이나마 주체가 안 되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인생이 너무 허망한 것인을 가만히주저 앉아되내어 볼 때였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그 고독 같던 시간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엄마는 그때 건드릴수 없는 싸움닭 같았다고 아빠가 말했다. 그냥 순순히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으르렁대며 친척들에게 모진 소리를 많이 하곤 했다고.
누가 그 마음을 알 수나 있을까.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를 지나 세월이 흘러 지금 나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 엄마 나이가 아닌 것을.
남편과 처음 풋풋한 연애를 할 때 어머니를 처음 뵈고 오던 날, 남편은 내게 어머니가 갱년기를겪으시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손이라도 잘 잡아드리고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 드리지 했더니 남편은 그런 나를 그냥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들만 세명인 어머님은 가끔 내게
나도 딸을 정말 바랬어. 그건 정말 내 맘대로 안 되는 거더라
며느리인 내가 딸과 같을 순 없다. 더군다나 내가 그리 살가운 며느리도 아니고.
어머님이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가족이 다 모이고 다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실 때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실 때가 많다. 어쩌다 보니 내가 그래서 어머님 손을 잡아드리거나 안아드릴 때가 많은데 그 절절한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나도 이제 큰일이다.
내 갱년기는 누가 돌봐주나.
나도 싸움닭으로 변하게 되면 어쩌나
안 그래도 한 성격 하는데 입에 모터를 달고 필터 없이 과감하게 욕을 해대고 그러면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