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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조셉 Jul 28. 2021

마음 만은 늘 그곳에 있습니다

남편아 우리 한국 가서 살래?

올해 한 해가 벌써 반 이상이 지났다.


둘째 임신 소식을 갖고 한국에 방문했던 것이 2019년 즈음이었는데, 그렇게 10달 뱃속에 품던 둘째가 태어 이젠 훌쩍 커서 걸음마를 뗀 지가 한참이 되었다. 영상 톡으로 부모님 얼굴을 자주 보여드리곤 하는데도 어린 둘째는 도무지 누군지 감이 없는지 전화기 버튼반 누를 뿐이다. 전화기 너머에는 "누구야.. 누구야.. 할머니 알아보겠어?" 안타까운 목소리만 맴돌 뿐이다.

둘째를 낳고 두어 달간 아기를 데리고 열몇 시간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갈까 생각해보았지만 코로나로 한국행 비행기가 속속들이 운행이 중단되고 내 산후조리해준다고 프랑스행를 끊어둔 엄마 티켓마저 쓰지도 못하고 백지로 날아가버렸다.


좀 진정이 되면 들어가야지 했던 게 이번이었는데,

백수가 되어 딩가딩가 시간도 많던 나였기에

9월 하반기 구직 성공이란 목표를 앞두고 심기일전하기 전에 한 달 한국에서 집밥이나 먹고 오자 하던 것도 돌연 변이인지 델타 변이가 속출하는 바람에 이마저도 흐지부지가 되었다.  


예전만 해질까.

그게 언제쯤이나 가능하려나.

이젠 마음속 품고 있던 희망이 희미해질 뿐이다.

아이 둘 데리고 2시간 차 동도 진이 빠지는데 열몇 시간 비행기는 이제 내가 엄두가 안 난다.




한국 가서 한 1년 살자.
애들이 더 많이 크기 전에..

시댁 가는 차 안에서 내가 남편에게 진지하게 얘기를 했다.

'한국 언젠간 가자' 하던 것이 우리 부부가 자주 하던 대화였기에 뜬금없는 주제는 아니었지만, 내가 그 화두를 먼저 꺼낸 일이 없었기에 남편이 무슨 일인지 내 머릿속을 읽으려고 하는 눈치다.


예전에는 겁 없이 훌쩍 떠날 수 있고 사랑 하나만 바라보고 나라도 바꿔봤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가능해지려면 "도 아니면 모"로 사활을 걸어야  문제가 됐다.

잘 다니고 있는 남편 직장이며, 10여년 남은 아파트 은행 대출, 아이들 학교, 보험, 집안 가구며 각종 불어난 짐 등... 모든 걸 다 유념해두어야 다. 선택지라고 한다면 내가 애둘만 데리고 기러기 엄마가 되는 건데 (남편이 기러기 아빠가 되는 건가? 여하튼..) 그것은 남편이 곧 죽어도 안된단다. 가족은 같이 있어야 가족이지 자기 혼자 덩그러니 프랑스에 남는 건 죽어도 싫단다. 나라면 핸드폰에 저장된 아이들 사진이며 영상을 닳도록 돌려보더라도 휴가 받아 아이들 얼굴도 볼 수 있고 한 1년 솔로 생활 신나게 즐기겠구먼 우린 이점에서는 참으로 동상이몽인가 보다.


한국을 가려고 하는 데는,

아이들 한국 문화 체험의 의미도 있지만

사실 부모님이 대한 의미가 더 크다.

가까이 살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다가 이리 타국에서 오랜 이방인이 되어보니 그 의미를 이제 잘 알겠다.

살 부대 끼며 별것 아닌 심심한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 누구 엄마 딸이 결혼을 했더라 내지는 누구네 아들이 이번에 첫아들을 낳았더라 등등 그런 엄마 아빠 주변 인물 얘기를 들으며 집 들어가는 길에 시장에서 홍시 한 소쿠리를 사다가 같이 앉아서 홍시를 먹는 건지 손바닥을 열심히 핥다 보면 깔깔깔 넘어가는 대화에 열두 시를 훌쩍 넘기고... 그런 소솔 한 것이 내게 꿈이 되었다.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졌다.

옆에서 잔소리나 해대는 딸이 와서 귀찮을지 모르겠지만 한국에 가게 되면 큰 봉고차를 빌려서 부모님과 오빠 내외와 여행이나 부지런히 다니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에 한국에 갈 때는 가족사진 하나 근사하게 찍어둬야겠다. 그리고 거실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큼지막하게 걸어두어야지. 두고두고 오래도록 사진을 봐야지.


엄마 아빠,

막내딸이 멀리 있지만 음만은 늘 그곳에 있습니다.

조만간 찾아뵐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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