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게으름과 무기력 사이의 모호함 때문에 곤란해지곤 한다. 나는 게으른 걸까, 무기력한 걸까? 고민하다가도 이런 고민이 실질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되새기고 생각을 그만둔다. 그리고 하염없이 방바닥에 눌어붙은 게으른 인간이 된다.
가만히 누워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삶이 오후의 긴 그림자처럼 늘어져 정지된 것만 같다. 그리고 녹슨 벽지의 곰팡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내 안의 자아는 곰팡이만큼 작아진다.
그러곤 내 안에 굴러가는 질문을 내버려 둔다. 나는 항상 왜 이럴까 하며 좌절하고 미루기를 반복하는 이유를 병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갖은 방법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에 미루는 일이 많다고 하는데, 그런 성향이 내 안에 있다고 어느 정도 납득을 하다가도 아니, 실은 모든 사람들이 이 정도의 성향은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내 안의 아주 조그만 완벽주의를 바라보곤 한다. 조그맣다.
되돌아보면 내가 고등학생일 때만 하더라도 아프니까 청춘이었고, 삶의 비밀(시크릿)은 뭉뚱그려 말하자면 강력한 긍정의 힘을 믿고 상상하는 힘이었다. 긍정의 믿음은 그걸 실현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해야 했다. 나는 모범적인 책벌레여서 그 말들을 굳게 믿으며 다른 사람에게 책을 권하기까지 했으니, 지금 와서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싶은 마음도 들지만 각자 알아서 잘 받아들였겠거니 싶다.
내 긍정의 신화는 불가항력적인 사고에 휩쓸려 한순간에 폭삭 무너졌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한병철, 『피로사회』)는 걸 나는 조금 늦게 알았다. 할 수 있다고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어왔지만 내가 실패를 겪었을 때, 그만큼 자책으로 돌아오기 쉬웠다. 우리는 모든 게 가능하기 때문에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내 탓이 되고 마니까. 그러면 사회나 계층 구조적인 문제가 개인의 탓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모두들 이제는 잘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이 피로한 사회에서 내 탓을 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서 줄곧 말해주고 싶다. 자책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실패는 당신 탓이 아니에요.
줄곧 나는 대체 게으른 걸까? 무기력한 걸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러다가 내가 게으른 나 자신을 지나치게 비난한다는 걸 깨달으면서 천성이 게으른 인간이라면 마음도 게을러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어느 정도는 무기력에 가까운 상태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무기력하든 게으르든 별 상관 없다. 오히려 내가 ‘천성이 게으른’ 인간이었으면 싶다. 한없이 바쁜 사회에서 여유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충분히 그럴 싹이 보인다.)
뜬금없지만 오늘은 강아지들과 산책을 하다가 문득 발밑을 내려다봤다. 따뜻한 봄날이어서 연둣빛 새싹들이 파릇파릇 올라와 괜히 발밑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풀밭에는 쌀알만 한 풀꽃들이 다복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잔잔하게 피어 있던 하얀 애기괭이밥꽃과 보라색 들꽃, 노란 민들레가 어우러져 있는 풍경이 날 아름답게 했다. 어떤 작은 것들은 눈으로 담기에 너무 소중해서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