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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수원옆미술관 Dec 18. 2022

초라한 인간일 때, 슬라임 유령

‘한심해 보이겠지. 하찮아 보이겠지, 별거 없어 보이겠지. 구차하고 철없고 사치스러워 보이려나.’

대기가 없는 달이 된 기분이다. 남이 던진 말에 얻어맞아 패다. 소행성에 가차 없이 두드려 맞은 달이 울퉁불퉁 크레이터가 생긴 것처럼 멋진 흉터가 생겼을까? 내가 달이었다면 아름다워 보였을까?


내가 나를 별거 없어 하고 하찮아하면 남이 나를 주무르는 대로 흐느적거리는 슬라임 유령이 된다.

“안녕, 난 슬라임 유령이야. 희미하고 흐느적거리는 데에 있어서는 우주 제일이지.”

약간의 유머로 형체를 유지해본다.

슬라임 유령은 말한다.

“나는 늘 유령이 되고 싶었지만 요즘은 다시 또렷해지는 느낌이야. 살아 있고 싶어.”

슬라임 유령이 살아 있으려고 고군분투하다가 흐느적거리는 몸을 갖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는 냉동실에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가, 냉동되어 썩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탈출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쓰다듬고 싶은 강아지가 세 마리나 생겨버렸어.”

흐느적거리고 희미한 슬라임 유령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슬라임 유령은 책임감을 갖기로 결심했다. 이별을 결심하는 것만큼이나 중차대한 결정이었다. 천천히 투명해진 몸을 광택이 나는 슬라임으로 바꾸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고 고생스러운 일이었지만 아직 남의 손아귀에서 납작해지고 마는 상태였다. 슬라임 유령은 슬펐다.

“내가 너무 초라해. 내가 너무 초라해. 자꾸 나를 납작하게 누르는 손가락들이 찾아와.”

슬라임 유령의 몸에서 뚝뚝 액체가 흘러나오다 증발했다.     


나의 슬라임 유령에게.


너는 애썼어. 그렇고 말고. 추위에 얼어붙지 않으려, 더위에 녹아내리지 않으려 애썼지. 어떤 날은 초콜릿처럼 또각또각 잘도 부러지고, 또 다른 날은 눈물에 잠겨 녹아내렸지만 너는 여전히 너였지.

너는 흐느적거리고 희미하지만 아직 살아 있어. 이곳에 있어. 너의 눈물은 따뜻하고, 너의 손가락은 다섯 개야. 적어도 사람이군. 너를 자랑스러워해도 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돼. 슬라임 유령아, 같이 살자. 늘 함께 살아남자. 희미하고 흐느적거리는 세상에서.     


p.s. 그런데 너의 몸은 해파리 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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