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학교에서 소설 창작 수업을 들을까 말까 하고 한참을 고민했었다. 분명 이성적으로는 취업에 도움이 되는 전공수업을 하나라도 들어야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남는 시간에 영어 공부라든가 자소서 준비라든가 취업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문학을 놓지 않은 탓에 한창 뜨거웠던 심장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해내라고 명령했다. 시간이 금세 흘러 놓쳐버리기 전에 나에게 중요한 것을 하라고 말이다.
안보윤 선생님은 나의 첫 문학수업의 선생이었고,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은 역시나 하고픈 것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 후로 1년이 넘게 흐른 지금,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과연 선생님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하고.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탁월한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훌륭하다.
전수영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주로 끔찍하다. 태어나 보니 언니 전수미는 악행을 계속하고 부모님은 나를 믿는다는 핑계로 나에게 향해야 했던 돌봄을 모두 전수미를 케어하는 데 사용하고, 쿠팡 노동자로서의 삶은 고되었으며, 그렇게 모은 돈은 전세사기로 한순간에 날아간다. 월세방 인근에 동물 요양병원에 운 좋게 취업하지만 원장은 이익을 위해 동물들을 이용하고 설상가상으로 전수미의 살해 재판, 나의 묵인 등이 뒤섞여 세상의 썩어있음에 좌절한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내가 이 썩은 세상에 속해있다는 것. 그간 살아오면서 생존을 핑계로 한 악의에 대한 묵인, 타인을 희생시키며 나의 잇속을 챙기던 행동들. 남의 악행을 고발하려던 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자괴감이 나를 괴롭힌다. 과연 나도 세상을 썩히는 데에서 자유롭지 못하구나 하고.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악인들이 내 안에도 잠들어있다는 사실. 나 또한 좀비가 되어가고 있다는 공포감은 자신을 더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더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은 세상에는 아직 썩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이다. 소수의 썩은 것들이 내가 인식하는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분명히 안다. 벌레 먹은 과일이 ‘썩었다’라고 쉽게 분류될지라도 그 과일에게는 아직 신선한 부분이 훨씬 많은 것처럼.
전수영은 그렇게 자기혐오를 극복할 수 있었다. 살면서 나를 해하던 사람보다 나를 도운 사람들이 몇 배는 더 많다는 것을 분명히 직시하며, 너희들의 악행과 나의 악행을 동일시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분명하게 다르다고 선언한다. 썩은 곳에 대한 내부고발은 나의 썩음까지도 고발해야 하기에 어려우며 두렵다. 다만, 그 썩은 부분이 나에게는 극히 일부라는 것을 스스로 명확히 한 인간에게 그 누가 돌을 던지랴. 세상의 많은 부분들이 혐오와 비난, 비교와 욕망, 이기성으로 더럽혀졌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직 그보다 더 많은 사랑과 희망, 우정과 연대, 빛이 남아있다.
그렇게 세상은 오늘도 흘러간다. 병들어가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이란 과연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