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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우 Sep 27. 2024

채식주의자 리뷰    [한강]

주입의 폭력으로 얼룩지어진 영혜의 

비참하다. 끔찍하다. 살기 싫어진다.

책을 다 읽고 뒷표지까지 덮은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은 이것뿐이다.

책은 3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채식주의자] , [몽고반점] , [나무불꽃] . 서로다른 세 인물의 시각으로 영혜라는 채식주의자의 삶을 들여다 본다.

그 끝은 끔찍한데, 책을 읽어나갈수록 작중 영혜가 죽고싶어하는 마음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 원인을 중심으로 이 책을 이해하려한다. 

어째서 죽고싶을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왜 그 마음에 공감이 되는지. 



어떠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본인을 쉽게 투영하고자 한다.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촉발된 이 욕구는 그 인간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자연스러운 수단으로 보이나 그 끝은 결국 폭력이다. 

특히나 본인보다 지위가 낮거나 에너지가 적은 사람을 대하게 되면 그 투영욕구는 커져 더욱 쉽게 행동으로 옮겨진다. 이것은 마치 동물의 먹이사슬과 비슷하다. 나의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타 생명의 에너지를 흡수한다. 

그 과정에서 타 생명은 죽고 나는 살아난다. 이 작품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가정폭력 아래에서 자라난 영혜. 어느날 불현듯 이상한 꿈을 꾸고는 채식주의자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직장도 결혼도 모두 본인의 뜻대로 해본적이 없던 그녀에게 처음 꿈이 생기고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처음 자신만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결정이 그 주변인들에게는 비극의 씨앗이 되어버린다.

영혜의 생애 첫 의지 발현이 주변인들에게는 이상한 일로 여겨지는 것. 이게 참 끔찍하다.

 

[채식주의자]

그녀의 아버지는 막내 딸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평생 그의 뜻대로 살아왔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이해할 수 없는 반항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꿈은 터무니 없는 것으로 변환되고 사회에 섞일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러니 다시 그의 틀 안에 집어넣어야만 하는 것이 되버린다. 

어린시절의 폭력처럼 영혜의 입구멍에 고기를 집어넣는다. 

그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이 그저 본인의 신념을 주입한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너는 반드시 이것을 따라야 한다는 듯. 



[몽고반점]

영혜의 자해를 목격한 그녀의 형부. 어느날 그녀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욕망을 들끓는다. 

속세의 때를 타지 않은 그 순수함을. 성인이된 후 대부분 사라지는 그 반점을 탐하게 된 그는 정신병원에 갖다온 영혜를 불러낸다. 

그는 그녀의 몸에 피어난 순수의 열매를 따먹는다. 본인의 성기를 꽃의 수술로 위장하곤 그녀에게 주입한다. 

이때에도 그는 그녀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영혜가 아니라 그가 잃어버린 그녀의 몽고반점. 어린시절의 순수일 뿐이니까. 


[나무불꽃]

영혜의 언니의 시선으로 정신병원에 갇혀버린 영혜를 바라본다. 남편과 영혜의 기괴한 모습을 목격한 후 영혜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은 그녀이다.

병원 역시 영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그녀의 목숨을 살려내기 위한 치료가 진행될 뿐이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그녀에게 호스로 음식물을 억지로 집어넣으며 진정제와 각종 약물을 주입한다.

치료를 명목으로 한 폭력이다. 

죽고싶은 자를 억지로 살려내는 것이 치료라고 사회적 합의가 되었을 지라도 그것이 그녀에겐 진정 치유가 될수는 없었다. 

그제서야 언니가 깨닫는다.  영혜의 마음을 무시한 채 본인 또한 그녀를 정신병원에 넣어버렸다는 것을.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돌이킬 수 없다. 그냥 그렇게 끝이 난다.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을 때 생겨난다. 

내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는 채 그저 본인들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를 바란다.  

태생부터 에너지가 적었던 영혜는 그런 이들에게 둘러쌓여 묵묵히 받아내야만 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에. 남편의 강요에. 형부의 욕구에. 호스관의 음식물에. 

단 한번이라도 그녀의 진심을 들어주는 이가 있었다면 그녀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강제적 주입말고. 고기와 약물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부에서부터 치유하고자 했다면 이 비극을 끝낼수 있지 않았을까. 이 소설에서 그런식의 소통은 볼 수 없었다. 주입의 폭력만 있을뿐.




책을 읽고나면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그녀는 왜 식물을 꿈꿨는가.

주변의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온 영혜는 다짐했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지 않기로. 타인을 착취하지 않기로. 아무에게도 본인을 주입하지 않기로.

이것이 바로 영혜의 꿈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온 생애를 폭력에 시달린 그녀만이 아무에게도 폭력을 가하지 않기로 다짐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며 슬프다.

어떠한 생명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그녀.

식물처럼 땅을 받치고 서서 오직 물과 햇빛만으로 살고 싶었던 그녀.

본인의 살고자 하는 의지가 때로는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담담히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끝내 식물을 꿈꾸게 된다. 비록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그러니까 나의 삶을 이미 끔찍하니 아무도 착취하지 않고 살아가는 식물처럼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다.

난 죽어도 돼. 너넨 잘 살아 이런 느낌.

책을 덮고나니 마음이 불편하다. 삶이 지옥같다.

분명 세상에 좋은 면도 있을 텐데 이 소설에선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다. 다 어디로 간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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