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썩 살만해 보인다.
우리는 늘 미래를 두려워하며 불안해 한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이따금씩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도중에, 불쑥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의 두려움은 우리가 미래에 혹여나 지금 가진 것들을 잃고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에서 싹튼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 달리고 치열하게 살려 노력하는 것이다. 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레고르라는 인물은 이런 불안감과 마주한 작가 카프카를 투영한 듯 하다. 심지어 카프카는 더 나아가 본인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 하루아침에 거대한 벌레가 되어버리는 상황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불안감의 본질을 찾아내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예상과 달리 이 벌레의 삶은 꽤나 살만해보인다. 잠시간의 당혹감을 지나 벌레의 몸에 적응한 그레고르는 방안을 돌아다니고 천장과 유리창에 매달리기도 하며 더이상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자유를 즐기게 된다.
물론 가족들 생계에 대한 걱정과 그들과의 연결이 끊어지지는 않을까하는 또 다른 불안감이 찾아오지만, 그러면 어떠하리라. 기쁨과 고통을 모두 가지게 되는것이 삶인데.
그레고르는 끝내 죽는다. 여동생의 "저것은 우리의 오빠가 아닌 벌레이다" 라는 선언을 듣고 죽게된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더이상 가족의 짐에서 벗어나 다시 흙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본인의 죽음이 우리 가족에겐 기쁨이 될 수있다는 그 양면성을 깨닫곤 기뻐하지 않았을까? 벌레로 변한 뒤 남은 생을 돈을 버는데 속박되지 않고 방안을 기어다니며 자유를 즐겼으니 썩 괜찮은 삶이라 느끼지 않았을까?
소설은 남은 가족들의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끝이 난다. 한 사람의 죽음은 다른 이들에게 삶의 전환을 의미하길 마련이다.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죽은 후에야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았고 또다시 활기를 갖게 된다.
나의 죽음이후에도 삶은 계속 된다. 심지어는 희망의 가능성을 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