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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희 Mar 23. 2022

감사가 아무리 좋아도 이건 아니죠

매일 감사 목록을100개씩쓰라고? 그래야 행복해진다고?

매일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런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건강하고, 행복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모든 좋은 습관이 그렇듯이 매일 조금씩 조금씩 오랜 기간(3개월 이상)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감사하기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많은 분들이 감사 일기도 쓰시고,

감사 목록 쓰기도 하신다.

학교에서, 기관에서, 회사에서, 종교 단체에서, 상담소에서도

감사하기를 진행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여기까지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기저기서 감사하기를 하다 보니,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효과적인 감사하기, 행복에 유익한 감사하기를 하기 위한 주의사항을 잘 모르고,

무작정 감사하기를 실천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났고,

그에 따라 감사하기가 그것을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불행하게 만드는 일들이 생긴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런 것이다.

감사 목록 100개 써오기!


흐음...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이렇게 감사 목록을 100개씩 쓰면 일단 숙제가 되고, 강요가 된다.

감사하기를 가벼운 마음으로 툭 시작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이런 식이라면 개수에 압도되어 하기 싫어지고, 미루게 된다.


감사하기를 시작했다고 해도 하는 과정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

100개 쓰기가 잘 되지도 않고, 집중하기도 어렵고, 엉덩이도 아프다.

행복하자고 시작한 일이 고통이 된다.


더 문제는 100개 정도 쓸 것이 없다는 것이다.

100개를 꾸역꾸역 채우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말 그대로 꾸역 꾸역이다. 별로 좋지 않다.

잘 생각 안나는 것을 억지로 억지로 채우다 보면,

기분도 나쁘고, 고통스럽다.


심지어 이런 식으로 잘 생각 안나는 것을 계속 붙잡고 있는 동안

우리 뇌에서는 예상치 못한 생각이 부상하게 된다.

이런 식이다.


-내가 감사 목록을 쓰려고 하는데 생각이 잘 안나네.

-생각이 잘 안 난다는 것은 감사할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군.

-내 삶을 감사할 것이 별로 없는 불행한 삶이로구나!

-아. 불행하다.


심지어 감사 목록 100개를 다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까지 느끼게 된다.

어떤가? 행복하자고 시작한 일인데, 결과는 전혀 엉뚱하지 않은가?


Photo by fotografierende on Unsplash


감사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 때나 좋은 것은 아니다.

여기에 수식어가 하나 붙어야 한다.

바로 '제대로 해야'라는 수식어다.


그럼 다시 말해보겠다.


감사는 제대로 해야 좋은 것이다.

감사는 제대로 된 방법으로 해야 좋은 것이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좋은 것을 많이 쓰는데, 왜 불행해질까?


이걸 설명하려면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인출 유창성'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인출 유창성이란, 어떤 정보가 빠르고 쉽게 생각하는 정도를 말한다.

빠르고 쉽게 생각나면, 그 정보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잘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감사목록 쓰기와 이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한번 스스로 점검해보라. 지금 감사목록을 3개 정도 써보시길 바란다.

아마 3개 정도는 쉽게 떠올랐을 것이다.

인출 유창성이 높다.

그리고 행복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감사목록을 10개 써보길 바란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당신은 3개 정도 쓰다가 잘 안 떠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끙끙거리다가, 한 두 개 더 썼는데, 10개까지는 쓰기 어렵다.

이런 것이 인출 유창성이 낮은 상황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었을 수 있다.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감사할 일이 별로 없네?

그리고 약간 불행해졌을 수 있다.


왜 전 주의 3개보다 많이 썼는데, 불행해질까?

이건 우리 뇌의 행복 시스템은 개수, 즉 양에 큰 무게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뇌는 강력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

강력하게 10개씩 쓰고, 더 강력하게 100개씩 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면서 역효과가 난다.


우리 뇌는 약하지만 자주 하는 것을 좋아한다.

2개 정도 쓰고, 3개 정도 쓰면,

기억도 잘 나고, 행복해진다.


아직도 감사는 좋은 거니까? 무작정 많이 하자고 생각하시는가?

아무리 좋아도 그건 아니죠!


*참고문헌

Haddock, G. (2002). It's easy to like or dislike Tony Blair: Accessibility experiences and the favourability of attitude judgments. British Journal of Psychology, 93(2), 257-267.


*표지 그림 출처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관련 홈페이지: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

http://happyfinder.co.kr/


*행복을 읽어 주는 인지심리학자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xpwfINPyNYaSKJX7Io2B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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