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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희 Jun 08. 2022

발전하는 정체성

정체성은 발견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오류에서 벗어나라!

보물찾기.


어린 시절 소풍 때, 누구나 한 번씩 해보는 게임이다.

게임 진행자가 구석구석,

선물이 적힌 쪽지를 숨겨놓으면,

참여자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쪽지를 찾는다.


쪽지를 찾고, 약속한 자리로 오면,

선물로 교환을 해준다.


작은 선물을 찾는 사람도 있지만,

큰 선물을 찾는 사람도 있다.

기분 좋기 위해 온 소풍인데,

작은 선물을 찾은 사람은 큰 선물 받은 사람을 보며,

기분이 좀 씁쓸해질 때도 있다.


보물찾기는 여러모로 학교 교육과 닮아 있다.

숨어 있는 정답을 찾아야 하는 시험과 닮아 있고,

숨어 있는 정체성을 찾으라고 강요하는 시스템과 닮아 있다.


그래서 일까? 성인이 된 나는 보물찾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난 두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데,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보물찾기는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에는 아주 단순하지만,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바로 인생이 보물찾기처럼 풀려가지 않으며,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보물찾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에 미래를 위해서는 보물찾기 식의 교육,

특히 보물찾기 식의 정체성의 교육을 바꿔야 한다.

정체성은 교육학자 에릭 에릭슨이 말한 것처럼 발견하는 개념이 아니다.

특히 직업적 정체성은 숨겨진 보물을 찾으면 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체성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들어가야 하고,

오랜 시간 반복해야 하며,

오랜 시간 정교화해야 하는 것이 바로 직업적 정체성이다.

한 10년 쯤 하다가 문득, 

"그래 이 일을 하길 잘했어"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 직업적 정체성이지,

시작하기도 전에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발견하고 확신한 것은 대부분 틀린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Photo by Amber Kipp on Unsplash


정체성을 발견한다는 개념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만들기도 한다.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사람은

어쩌다 마주치게 되는 과업을 내 정체성을 심화시킬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놓쳐버리기 일수다.

느낌이 안 온다는 이유로,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생각해 본 적 없다는 이유로,

즉 발견 못했다는 이유로 안 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면, 평생토록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정체성을 발전시킨다는 개념을 가진 사람은 다르다.

잘 몰라도 도전한다. 어쩌다 시작한 일이지만 열심히 한다.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일에서 뭔가 배우고, 깨달아가면서

그 일을 점차 자신의 정체성으로 만들어간다.


또한 정체성을 10대 때 일찍 발견하려고 한 사람들,

그리고 실제로 10대 때 정체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교사, 의사 등)

30대 후반에서 40대 사이에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10대 때 너무 일찍 정체성을 정해버린 나머지 유연성이 사라지고,

다른 기회들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들이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혼돈이다.

사춘기가 아닌 사십춘기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심지어 현대의 학교 교육은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뒤처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정체성을 이른 시기에 발견 못한 사람은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근심한다.

아마 선생님들이 비교적 일찍 정체성을 발견한 사람들(?)이기에 그런 모양이다.

그런데 이건 아시는가? 그렇게 일찍 정체성을 발견하신 교사라는 직업이

번아웃(탈진)되는 직업 순위에서 늘 상위권이라는 사실 말이다.

(번아웃 되는 직업 1위가 교사이다.)


왜 그렇게 일찍 정체성을 발견하신 분들이

교사로서의 사명감을 유지하지 못하고 흔들릴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건 교사분들 잘못이 아니라,

교육학에서 정체성을 발견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것도 이른 시기에 발견해야 하는 것처럼 오해했기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다.


교육은 정체성을 만들어가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교육이 정체성 형성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사십춘기를 경험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교육이라면, 바꿔야 한다.

이론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가장 업데이트가 빨라야 할 교육분야가

업데이트가 가장 느린 이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전히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언제 이런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면,

개개인부터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나의 정체성을 천천히,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 보자.


정체성을 모르겠다고? 정상이다!

천천히 만들어가면 된다.


너무 이른 시기에 정체성을 알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걱정스럽다.

안다는 착각일 수 있으니 말이다.


여전히 정체성을 발견하려고 하고 있는가?

발견하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는가?

그럴 필요없다. 정상이다. 지극히 정상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그리고 이제 새로운 주문을 외우라.


정체성은 발견이 아니라, 발전이다.


*참고문헌

Maree, J. G. (2021). The psychosocial development theory of Erik Erikson: Critical overview. Early Child Development and Care191(7-8), 1107-1121.


Schachter, E. P. (2005). Erikson meets the postmodern: Can classic identity theory rise to the challenge? Identity5(2), 137-160.


*표지 그림 출처

Photo by Amber Kipp on Unsplash


*인지심리학자 이국희 교수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xpwfINPyNYaSKJX7Io2B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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