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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희 Jun 15. 2022

다양한 정체성

정체성은 하나여야 한다는 거짓에 맞서 싸워라!

에릭 에릭슨(Erik Erikson, 1902 - 1994)의 성인발달이론(adult development)에 따르면,

10대(청소년기)에는 정체성을 찾기를 완수해야 한다.


10대에 정체성 찾기를 완수하지 못하면,

정체성 위기를 겪게 되고, 이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기가 어려워지며,

결국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하기 힘들단다.


이 이론은 교육계에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모든 국민의 10대를 책임지는 공교육(의무교육)은 더 열광적으로 이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장래희망 직업 쓰기 같은 것을 하는 것이다.


이 이론이 처음 등장한 1960년 대 무렵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여전히 학교에서는 장래 희망을 정해야 한다.

이런 것을 정하지 못하는 학생은 소위 꿈도 희망도 없는 아이,

정체성 확립을 제대로 못한 아이로 취급받는다.


아무도 이 이론이 진짜 옳은 이론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냥 당연히 모든 아이들은 청소년기에 장래 희망을 정하고,

대학 전공을 명확히 정해야 하는 것처럼 강요하고,

문과와 이과, 예체능을 갈라놓는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10대 시기에 장래희망 직업 정한다고 그렇게 되는가?

10대 때 대학 전공 정한다고 그대로 전공 살리게 되는가?

10대 때 문이과, 예체능 정하면, 그대로 되는 건가?


여러분이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다.

장래희망 직업대로 되지 않고,

대학 전공대로 되지 않고,

문이과, 예체능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왜냐고? 10대 때 생각했던 세상과 20대 때 바라보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20대에 바라보는 세상과 30대에 바라보는 세상은 다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상도 변하지만, 나도 변한다.

변한 세상 자체로 인해 10대 때의 의사결정이 큰 영향을 발휘하기 어려워지고,

바뀐 나 자신으로 인해 10대 때의 의사결정이 큰 영향을 발휘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인생에서는 어쩌다가 시작하게 되고, 어쩌다가 접하게 되고,

어쩌다 마주치게 되는 일과 기회들이 많다.

처음에는 의미도 모르고, 가치도 모르고, 내 정체성인지도 몰랐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 깨닫고 보니 내 정체성인 것 같고, 잘 선택했다고 느껴지게 되는 일들이 있다.

어쩌다 하게 되었지만, 하다 보니 좋아지고, 하다 보니 잘하게 되고,

처음엔 몰랐는데, 하다 보니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는 일들이 훨씬 많다.

어떤 TV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어쩌다 어른'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인생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10대에 발견할 수 있겠는가?


Photo by averie woodard on Unsplash


그리고 지금 시대 자체가 문이과, 예체능 같은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기다.

국문학과가 컴퓨터공학도 배워야 하고,

디자인 전공자가 통계를 배워야 하며,

건축 전공자는 심리학도 배워야 하는 시대다.

학문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다양한 학문들을 배우고 익혀서

우리 머릿 속에서(우리의 뇌 안에서) 융합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심지어 에릭슨의 이론이 나왔던 1960년 대와 지금은 인간의 기대수명 자체가 다르다.

1960년대의 기대수명은 60세였다면,

지금은 100세 시대이다.

인간의 인생이 60세로 마감될 때는

10대 때 직업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 분명 필요했고,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인간의 기대수명은 에릭슨이 살던 시대에 2배가 되었다.


산업의 구조도 달라졌고,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졌다.

기대수명이 60세 일 때는 평생 직업이라는 개념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평생직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길게 잡아 60세에 은퇴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40년을 살아야 하기에

적어도 한 번은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더하여 대학에 가서 뭔가 하나만 전공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복수 전공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가고 있다.


또한 분야 전문성이 심화되면서 학부생 수준으로 뭔가 전문성을 기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마다 학석통합과정을 발 빠르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학사 학위 정도로는 어디 명함 내밀기도 어려운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배움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배움이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계속 길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 시대의 정체성은 꼭 한 개로 고정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원래부터 정체성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아빠이기도 하고, 교수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하면서, 독서가이기도 하고,

영화 애호가이기도 하고, 유튜브 크리에이터이기도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낮에는 회사원, 밤에는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낮에는 사업가, 밤에는 웹툰 작가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주중엔 회사원, 주말엔 페인트칠 업자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이 시대의 정체성은 변화무쌍하고, 다채롭다.


그런데 뭐? 10대 때 직업적 정체성을 정해야 한다고? 장래 희망 직업을 쓰라고?

웃기는 이야기다.

에릭 에릭슨의 이론은 지금 이 시대와 전혀 맞지 않는다.

이론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면, 이론을 폐기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이다.


과거의 정체성 이론을 이 시대에 맞는 이론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체성 이론을 토대로

정체성이 하나로 분명히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거짓에 대항하라!


*참고문헌

Maree, J. G. (2021). The psychosocial development theory of Erik Erikson: Critical overview. Early Child Development and Care191(7-8), 1107-1121.


Schachter, E. P. (2005). Erikson meets the postmodern: Can classic identity theory rise to the challenge? Identity5(2), 137-160.


*표지 그림 출처

Photo by Alex Geerts on Unsplash


*인지심리학자 이국희 교수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xpwfINPyNYaSKJX7Io2B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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