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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희 Jun 22. 2022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공동체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

한국인들은 올림픽에서

양궁 선수들의 경기에 주목한다.

잘하기 때문이다. 잘해도 정말 너무 잘한다.


과녁의 중앙 즉, 10점 서클에 적중시키는 것도 놀라운데,

때로는 정중앙을 꿰뚫어 버린다. 소위 '엑스 텐(X ten)'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과녁의 정중앙.

이 지점이 바로 양궁 선수들의 목표다.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지점인 것이다.


축구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축구공을 골대 안에 도달시켜야 하고, 이것이 축구 선수들의 목표다.


이처럼 목표란, 인간의 도달해야 하는 혹은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다.

이런 목표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양궁에서 한 세트에 3발씩 쏘고,

그때그때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면서 조준을 새롭게 하듯이

조준해야 하는 지점은 계속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세트가 새롭게 바뀔 때마다 표적지가 갱신되듯이

모든 게임은 새로운 목표이다.


축구도 한 경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경기가 다르고, 모든 경기가 새롭다.

모든 경기의 골은 새로운 골이다.


여러분은 어디에 도달하고 싶은가?

여러분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양궁 선수들이 맞춰야 하는 과녁의 정중앙보다 복잡하다.

축구 선수들이 넣어야 하는 골보다도 더 복잡한 것이 바로 이 질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디에 도달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내 인생에 대한 질문이자.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와 관련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적 질문의 답이 쉬울 리 없다.


사람들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목표가 (양궁의 과녁처럼) 분명하고, 단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인생은 그렇지 않다.

인생의 질문이 스포츠처럼 단순했다면, 모두가 잘 살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잘 살지 못한다.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못 사는 사람도 있다.


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둔 우리가 의지할 곳은 없는 것인가?


Photo by Markus Spiske on Unsplash


포기하기엔 이르다. 다행히 인류의 역사에는 훌륭한 철학자들이 있다.

인생 문제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평생 탐구한 끝에

어떤 답에 도달한 사람들 말이다.


오늘 소개할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러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인생의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이자, 나름의 답에 도달한 사람인 것이다.


그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세들에게 어떤 목표를 세우라고 말해주고 있을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을까?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그 답이 제시되어 있다.


이 답을 이야기하기 전에 여러분이 알고 계실 것이 하나 있다.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 이름이다.

즉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아들에게 한 말이다.

아들에게 한 유언이다.

그 유언이 허언 일리 없다.

진심 중에 진심이고, 아들이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 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이제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배경도 알았으니,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에게 남는 유언의 핵심을 알아보자.


"유다이모니아(Eudaimonia)"

이 한 단어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너는 유다이모니아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나아가야 할 지점이고,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며,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다!"


유다이모니아 뭔가 중요해 보인다.

이 말은 사람들이 보통 행복이라고 번역하는 말이다.

그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에게

'아들아. 행복이 최종 목표다!'라고 말한 걸까?

미안하지만, 이건 유다이모니아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유다이모니아는 엄밀히 말해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는 관련이 없다.

즐거움, 미소, 웃음, 기쁨 같은 쾌락적인 단어들,

쾌락적인 행복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 유다이모니아이다.


유다이모니아는 딱 한 단어로 풀 수 없는 말이다.

우리말에 대응하는, 영어에 대응하는 정확한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설명해야만 알 수 있다.


유다이모니아란,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사용해서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란 의미다.


여러분이 잘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을 통해 공동체가 간지러워하는 곳,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라,

그럼 유다이모니아를 달성한 것이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이 있는가? 그것을 통해 나만 좋고 끝나면 유다이모니아는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

그것이 유다이모니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행복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아들아! 너는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네가 가야 할 곳이고, 네가 살아야 할 인생의 목표다!"


목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목표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유다이모니아, 즉 진정한 목표,

모든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아니다.


공동체를 해하는 목표, 공동체에 손실을 주고, 피해를 주고,

공동체 구성원을 해치는 목표는 사실 목표가 아니다.

이런 것들에는 목표라는 말을 붙여주지 않는다. 이런 건 범죄다.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 행위다.


목표를 세웠는가? 그럼 그것이 유다이모니아의 정신에 입각해 있는지 점검하라.


자신의 역량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는 것,

이것이 유다이모니아이고,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목표다.


*참고문헌

Heinaman, R. (1988). Eudaimonia and self-sufficiency in the Nicomachean Ethics. Phronesis33(1), 31-53.


Ryan, R. M., & Martela, F. (2016). Eudaimonia as a way of living: Connecting Aristotle with self-determination theory. In Handbook of eudaimonic well-being (pp. 109-122). Springer, Cham.


Waterman, A. S. (1990). The relevance of Aristotle’s conception of eudaimonia for the psychological study of happiness. Theoretical & Philosophical Psychology, 10(1), 39–44.


*표지 그림 출처

Photo by Ronnie Overgoor on Unsplash


*인지심리학자 이국희 교수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xpwfINPyNYaSKJX7Io2B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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