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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희 Jul 20. 2022

음미하기와 공부하기

내 머리에 담아 두어야 음미할 수 있다

동양 역사를 보면,

자신의 뜻을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경우들이 많다.


이렇게 우회로를 택해 누군가의 뜻을 전달받은 사람은

그 뜻을 음미해보면서 곰곰이 생각하는 과정을 거친다.


고려말 이성계의 아들이자 후에 조선의 세 번째 왕이 되는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하여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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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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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왕조를 세워 새 시대를 열자는 뜻을 우회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정몽주는 이 시를 음미하면서 그 뜻을 간파한 후, 단심가로 화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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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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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받고 음미한 이방원은

자신의 마음은 절대 변치 않으니 건들지 말라고 말하는 것임을 간파하고,

정몽주를 죽인다.


중국 삼국시대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사마의》에도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업성에 자신만의 왕국인 위나라를 세운 조조가 정원을 만들고, 개관식을 한다.

정원 문 앞에 선 조조는 한 신하에게 붓과 먹을 가져오게 하더니,

문에다가 '活(살 활)' 자를 쓴다. 그러더니 신하들에게 묻는다.


이게 무슨 뜻인 줄 아시오?


당대의 뛰어난 사람 중 하나인 양수가 나서서 이렇게 말한다.

門(문 문)안에 活(활)이 있으니, 闊(트일 활)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문을 터야(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조는 맞다, 틀리다고 말하지 않고,

양수가 글자 풀이에 능하다고 하고 상황을 종료한다.

과연 정원 문을 헐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당시 병을 핑계로 조조를 만나지 않고 있던

순욱에게 이 소식이 알려진다.

그리고 그 뜻을 음미하던 순욱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살 수 있을 것을...'


그리고 이것이 조조의 진정한 뜻이었다.

당시 한 나라의 신하들은 조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탐탁지 않아하고 있었는데,

조조가 문에 살 활자를 써서 이 문으로 들어가면 살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왕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양수는 단순한 글자 뜻풀이를 했다고 볼 수 있고,

순욱은 음미하기를 통해 그 속 뜻을 간파했다고 볼 수 있다.


Photo by NeONBRAND on Unsplash


그래서일까? 국어사전에서 '음미하기'를 찾아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1) 시가를 읊조리며 그 맛을 감상함

2) 어떤 사물 또는 개념의 속 내용을 새겨서 느끼거나 생각함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음미하기란, 어떤 것의 표면만 보고 쉽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음미하기는 깊은 생각을 통해 어떤 것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위한 추론과정이다.


음미하기는 결코 가볍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미하기는 충분한 여유 시간을 가지고,

대상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고,

잊고 있던 중요한 것을 되살려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며,

내 머릿속에 있는 다양한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해보는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다.

(명상하고는 다르다)


심지어 음미하기는 암기 내지 암송을 요구할 때도 있다.

생각해보라.

어떤 시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음미하려면?

귀에 들리지 않을 때도 음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외워야 한다.


소설에 나오는 명언의 속 뜻을 음미하고,

필요한 순간에 꺼내서 다시 생각하거나,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명언을 외우고 있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이 시를 암송했던 이유는 머릿속에 넣어 두고,

두고두고 음미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공자 말씀과 맹자 말씀을 암송했던 이유는 머릿속에 넣어 두고,

두고두고 음미하기 위함이었다.

성직자들이 종교 경전의 말씀을 암송했던 이유는 머릿속에 넣어 두고,

두고두고 음미하기 위함이었다.

외부에 있는 책은 없어질 수 있지만,

머릿속에 넣어 둔 것은 없어지지 않으며,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책을 쓰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는가?

책이 책장에만 꽂혀 있어 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음미해야 하는데,

책장에 꽂아 두고 그것으로 만족하면 아무 의미가 없기에

자신 자신의 말들을 제자들에게 다 외우게 한 후, 자신은 책을 쓰지 않았다.

물론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이 말을 듣지 않고, 스승이 한 이야기를 책으로 내버렸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음미하기는 공부하기와 많이 닮았다.

공부가 그렇지 않은가?

내 머릿속에 지식을 넣어두고, 이렇게 저렇게 변형도 해보고, 응용도 해보고,

그러다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낸다.

다양한 지식을 음미하다 보면, 저절로 공부가 되는 것이다.


어떤가? 여러분은 음미할 재료들을 머릿속에 많이 넣어두고 계신가?

그렇지 않다면, 넣어두셔라.

필요한 순간에 음미할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연구 결과들도 있으니 말이다.


음미하기는 공부하기다.


*참고문헌

Wolf, M. (2018). Reader, come home: The reading brain in a digital world. New York, NY: Harper.


Wolf, M., & Stoodley, C. J. (2008). Proust and the squid: The story and science of the reading brain. New York: Harper Perennial.


Bryant, F. B., & Veroff, J. (2017). Savoring: A new model of positive experience. Psychology Press.


Jose, P. E., Lim, B. T., & Bryant, F. B. (2012). Does savoring increase happiness? A daily diary study. The Journal of Positive Psychology7(3), 176-187.


Smith, J. L., & Bryant, F. B. (2017). Savoring and well-being: Mapping the cognitive-emotional terrain of the happy mind. In The happy mind: Cognitive contributions to well-being (pp. 139-156). Springer, Cham.


Lenger, K. A., & Gordon, C. L. (2019). To have and to savor: Examining the associations between savoring and relationship satisfaction. Couple and Family Psychology: Research and Practice, 8(1), 1–9.


*표지 그림 출처

Photo by Fakurian Design on Unsplash


*인지심리학자 이국희 교수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xpwfINPyNYaSKJX7Io2B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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