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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희 Aug 17. 2022

지식의 뿌리와 흐름을 음미하기

모든 분야에는 역사가 있다

토너먼트(Tournament).

단판으로 승부를 가린 후, 이긴 자는 다음 라운드에 올라가고,

진 자는 그 자리에서 탈락하는 무시무시한 경쟁방식.


이런 극단적인 방식 때문에

진 쪽은 굉장한 상실감을 맛보고,

이긴 쪽은 어마어마한 쾌감을 맛본다.


월드컵 예선과 본선의 조별리그가 끝나면, 토너먼트가 있고,

농구에서 정규시즌이 끝나면, 토너먼트로 챔피언을 가리며,

야구에서도 정규시즌이 끝난 후에는 토너먼트로 챔피언을 가린다.


세상에는 별의별 토너먼트가 다 있으며,

그곳에서 높은 라운드까지 진출한 사람들,

더 나아가 우승자는 명예와 부를 얻는다.


미국 어린이들에게도 이런 토너먼트가 하나 있으니,

바로 내셔널 스펠링비(National Spelling Bee, 이하 NSB) 토너먼트다.


한국을 비롯한 각 국에서도 대표를 선발하여 내보내는 대회가 되었으니,

이제 명실공히 세계의 공부 좀 하는 어린이들을 흥분하게 하는 토너먼트가 되었다.


NSB는 초등학생과 중학생만 참여가 가능하다.

즉 7세부터 14세까지만 참여할 수 있다.

(한국 나이로는 8세부터 15세까지만 참여가 가능하다)


그렇다는 것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영어 꾀나 한다는 친구들은

모조리 이 대회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내셔널 스펠링비의 진행방식은 팀과 팀이 맞붙어서 한 팀이 떨어지는 그런 토너먼트는 아니다.

개인 토너먼트 경기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국의 골든벨이라는 프로그램과 동일하다고 보시면, 이해가 될 것이다.

먼저 라운드는 여섯 라운드까지 있는데,

각 라운드마다 제한 시간이 있고, 그 안에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답을 작성하거나,

소리 내어 말해야 한다.

기준에 부합하는 답을 맞히는 사람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바로 짐 싸서 가야 한다.


당연히 1라운드에서 바로 탈락하여 짐 싸서 가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2라운드에서도 만만치 않은 인원이 탈락한다.

3라운드, 4라운드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남는 사람은 적어진다.

그리고 5라운드(세미 파이널)와 6라운드(파이널)에 가면,

보통 10명에서 16명 정도의 아이들만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이들 중, 단어가 다 떨어질 때까지 살아남거나

25라운드가 진행되기 전에 살아남은 사람 1명 혹은 복수의 인원에게

챔피언의 영예와 상금이 부여된다.


과연 이렇게 대단한 아이들은 누굴까?

전 세계에서 영어 단어 많이 아는 사람들만 모아 놓은 중에도,

파이널 라운드까지 진출하고, 그중에서 심지어 우승을 하는 청소년들은 어떤 친구들일까?


이런 질문 앞에 모든 사람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대답은 타고난 언어 천재들이라는 것이다.

언어 지능은 누구보다 뛰어난 친구들,

소위 말하는 IQ 검사에서 160, 170 정도 되는 엄청난 지능의 소유자들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여러분도 그랬을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축복받은 아이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미안하다. 여러분을 실망시켜야겠다.


이 대회의 파이널 라운드까지 진출하는 어린이들의 언어지능 검사 점수는

그냥 평균적이다. 전 세계 어린이들의 언어지능 표준화 점수 평균인 100 수준이라는 뜻이다.

더 정확히 말해줘야 하는가?

NSB에서 마지막 라운드까지 올라가고,

심지어 우승하는 친구들은 사실 그냥 평범한 친구들이다.

타고난 재능도 뛰어난 언어지능도 없다. 그냥 평범하게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이다.


마지막 라운드 진출자가 아니더라도,

세미 파이널 진출자까지만 봐도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오히려 언어 지능이 진짜 높았던 친구들,

암기를 잘한다고 정평이 나있고, 천재다, 영재다 소리 들었던 친구들은

세미 파이널 정도까지만 가도 벌써 보이지 않는다.

세미 파이널 진출한 친구들의 지능과 재능은 그저 다 평범한 수준이다.


그럼 진짜 차이는 무엇일까?

평범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하루에 10시간씩 죽어라 공부하고,

단어 외우고, 또 외운 것? 이것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미안하지만 또 여러분을 실망시켜야겠다.

NSB 참가자 중에 죽어라고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 죽어라 공부한다.


자. 더 끌지 않고, 과학적 사실을 말해주겠다.

NSB에서 이른 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사람과 높은 라운드까지 올라가는 사람의 차이는

타고난 지능도 아니고, 언어 지능 검사 점수도 아니며, 학습량도 아니다.


오직 학습의 질, 즉 어떤 학습을 했으며, 어떻게 학습을 했는지가

낮은 라운드 탈락자와 높은 라운드 진출자를 가르는 핵심 변인이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학습량은 전혀 소용없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말했지 않은가. 이 대회 출전자들은 이미 어마어마한 학습량을 가진 친구들이다.

이런 친구들에게 차이를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양이 아니라는 뜻이지,

양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Photo by Ying Ge on Unsplash


그럼 NSB 상위 라운드 진출자들, 더 나아가 우승자들은 어떤 공부를 했을까?

핵심은 어원 학습이었다.

영어에는 어원이 있다.

그리스어 어원, 프랑스어 어원, 독일어 어원, 라틴어 어원이 대표적이다.

어원을 학습하는 어린이들은 자연스럽게

한 영어 단어를 구성하는 철자 요소들의 구조를 보게 된다.

영어에서 길고 어려운 단어일수록 몇 가지 다른 단어들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들이 많다.

앞 철자 3개의 의미가 따로 있고, 가운데 철자 5개의 의미가 따로 있으며,

끝에 있는 3개 철자의 의미가 따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3가지 결합이 특정한 단어의 의미가 되곤 한다.


이런 걸 공부한 어린이는 단어 철자를 무작정 외우는 것이 아니라,

단어를 구조화해서 외우게 되고,

단어 구조별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또한 어원과 현재 영어 단어 철자 사이의 관련성을 깨우치면서

철자를 의미 단위로 이해하게 된다.


어떤 단어를 외울 때, 동의어와 반의어를 같이 외우면 기억 단서가 풍부해지면서

단어를 잘 잊어버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건 인지심리학적인 사실이다.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 주는 단서가 많아지면, 기억이 강화된다.

이 정도만 해도 기억력이 좋아지는데, 여기에 어원 학습까지 더해진다면?

그냥 무작정 단어를 외우는 사람들이 절대로 가지지 못하는 기억 단서와 배경지식이 더해지고,

단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기억력이 더욱 강화된다.


그리고 이런 학습방법의 혜택은 NSB에서 높은 라운드에 진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심지어 우승자가 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지금 이런 일은 NSB 참가자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분야에는 어원 학습과 같은 성격의 지식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모든 분야의 역사이다.

모든 분야는 그 분야가 걸어온 길이 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지식들이 있다.

그것이 그 분야의 어원이다.

여러분은 그 어원을 학습하고,

그 어원을 음미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려고 시도해본 적이 있는가?


컴퓨터 사이언스? 역사가 있다!

건축? 역사가 있다!

디자인? 역사가 있다!

경영? 역사가 있다!

법? 역사가 있다!


국사와 세계사를 배워야만 역사 공부가 아니다.

모든 분야는 역사와 무관하지 않고,

그것이 NSB의 어원 학습과 같은 것이다.


하다못해 교과서에도 역사가 있고, 변천사가 있다.

대학 교재의 초판과 지금 나온 최신판에는 차이가 분명하다.

새로 생긴 것도 있고, 없어진 것도 있고, 달라진 것이 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교재를 놓고, 비교하고, 음미하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본 적이 있는가?

내가 교과서를 새로 쓴다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진짜로 교과서를 새로 쓰려고 시도한 적 있는가?

이런 것이 진짜 공부고, 질적으로 다른 공부다.


여러분 분야의 역사를 모르면,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것이 내가 공부하는 분야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것들이 합쳐지고, 융합돼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는가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냥 무작정 공부하게 된다.


역사를 모르면 흐름을 잡을 수 없고,

역사를 모르면 어디쯤을 배우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역사가 없으면, 같이 저장할 기억의 단서들이 부족해지기에 무작정 공부하게 되고,

이렇게 맥락 없이 공부한 것들은 그 지식을 붙잡아줄 것들이 부족하기에 쉽게 소멸된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학생들 중에는

수업 중에 그런 역사를 가르쳐주는 수업이 없다고 한다.

에휴... 그런 걸 수업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가?

스스로 찾아서 공부해야지!

NSB에서 상위 라운드에 진출하는 친구들은 뭐 그런 수업이 있어서 공부했는가?

자신들이 알아서 어원사전 찾아보면서 공부한 것이다.

지능이 평범한 초등학생과 중학생도 이렇게 찾아가면서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하는데,

대학생들이 그래서야 되겠는가.


정답 찍기 교육만 받은 사람들,

시간제한 있는 시험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막상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동기부여가 안 된다고 한다. 꽉 붙잡아서 조여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나...

큰 일이다. 미래 사회는 자기가 할 일을 알아서 찾아서 해야 하는데 말이다.


더 늦기 전에 각 분야에서 어원 학습과 같은 것을 시작하자.

각 분야의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진짜 공부를 하자.


이렇게 역사를 음미하는 공부를 해 나간다면,

여러분이 그토록 원하던

전문 지식이 차곡차곡 축적되어갈 뿐 아니라,

토너먼트의 승자가 될 수 있는

역량의 차이를 만들어 줄 것이다.


*참고문헌

Rousmaniere, T., Goodyear, R. K., Miller, S. D., & Wampold, B. E. (Eds.). (2017). The cycle of excellence: Using deliberate practice to improve supervision and training. John Wiley & Sons.


Duckworth, A. (2016). Grit: The power of passion and perseverance. Scribner/Simon & Schuster.


Ward, P., Hodges, N. J., & Williams, A. M. (2004). Deliberate practice and expert performance: Defining the path to excellence. In Skill acquisition in sport (pp. 255-282). Routledge.


Miller, S. D., Chow, D., Wampold, B. E., Hubble, M. A., Del Re, A. C., Maeschalck, C., & Bargmann, S. (2020). To be or not to be (an expert)? Revisiting the role of deliberate practice in improving performance. High Ability Studies31(1), 5-15.


*표지 그림 출처

Photo by Aaron Burden on Unsplash


*인지심리학자 이국희 교수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xpwfINPyNYaSKJX7Io2B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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