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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희 Jan 10. 2024

전문가다운 말이 절실한 사회

국민적 갈등을 완화하는 전문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사회경제 체제를 옹호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옹호하고 유지하려는 사회경제 체제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그 체제를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과 자원을 집중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정치라는 것이다.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 스스로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대리인(대통령, 국회의원, 시장, 교육감)을

투표를 통해 선정하는데, 한 표라도 더 얻은 후보, 즉 한 명에게라도 더 지지를 받은 쪽이 당선되어

더 많은 국민이 바라는 사회경제 체제를 실현한다.


한 사회경제 체제에 대한 지지가 다른 쪽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때도 있지만, 근소한 차이일 때도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적 갈등과 분쟁은 근소한 차이일 때 나타난다.

선거에 이긴 쪽은 이긴대로 불안하고, 진 쪽은 너무 아쉽다.


이런 사회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정견)들 중, 특정 정견에 대한 선호가 압도적이라면,

소수의견은 마치 없는 것처럼 될 것이지만,

두 가지 상반된 정견이 팽팽하게 맞선다면, 또 누구말이 맞는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고,

결국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다면,

국민적 갈등과 분쟁이 심해지고, 정적에 대한 혐오감이 커지며, 더 나아가 내전까지 발생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국민적 갈등과 분쟁을 완화할 수 있을까?(제거하긴 어렵더라도)

어떻게 해야 서로의 의견차이를 좁히고 최소한의 공통 분모와 공통 기반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떤 분들은 이견이 있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고, 국민들께 알리자고 한다.

이런 일은 현실 정치에서 수없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권위있는 전문가의 의견이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들어보는 것 말이다.

세계적인 석학과 인터뷰를 하거나, 노벨상 수상자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연다.

TV에서 생중계를 하고, 녹화 방송도 하고, 유튜브로 생중계도 한다.

한 분야의 실무자로 오랜 기간 일해 온 분의 의견을 듣거나, 인터뷰를 하여 신문에 싣는다.


그럼 이제 끝난 걸까? 이렇게 전문가의 의견을 들었으니, 국민들이 더 나은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을까?

노벨상 수상자의 강연을 들은 국민들이 자신의 극단적 의견을 조금은 중립적인 방향으로 옮기게 되었을까?

해당 분야의 실무자의 이야기를 들은 국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그 실무자의 의견에 가깝게 조정하였을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정치심리학의 연구결과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하버드대학에서 이루어진 연구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연구진은 학생들에게 정치적 이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주제 중 하나인 기후변화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1) 당신은 인간으로 인해 기후변화가 발생하고 있다고 믿는가? yes/no

2) 당신은 온실가스 배출 감소를 위한 파리 기후 협약을 지지하는가? yes/no


응답을 받은 연구진은

1)번과 2)번 모두 'no'라고 응답한 사람은 인간이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믿지 않는 집단으로

1)번과 2)번 모두 'yes'라고 응답한 사람은 인간이 기후변화를 일으킨다고 믿는 집단으로 분류했다.


그 후, 두 집단 모두에게 2100년까지 지구 평균 기온이 얼마나 오를 것인지에 대한

기후 학자들의 예측 평균치가 3.4도임을 제시하였다. 일종의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다.

남은 일은 두 집단에게 자신과 깉은 견해를 가진 전문가의 의견과

다른 견해를 가진 전문가의 의견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두 집단 모두에게

'인간에 의한 지구 온난화는 심각하고 2100년이 되면 지구평균 기온은 5-6도 정도 상승할 것'이라는

기후 전문가의 견해를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에 의한 지구 온난화는 심각하지 않고 2100년까지 지구평균 기온은 1-2도 상승에 그칠 것'이라는

또 다른 기후 전문가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눈치챘겠지만,

전자는 인간이 일으키는 기후 변화가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부합하는 견해이고,

후자는 인간이 일으키는 기후 변화가 심각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부합하는 견해였다.


마지막으로 실험 참가자 모두에게 2100년까지

지구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몇 도 상승할 것은지 자신의 의견을 쓰라고 했다.

과연 하버드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어떤 전문가의 의견에 맞추어 조정한 예측을 했을까?

아니면, 두 기후 전문가의 의견을 보여주기 전에 주었던 기후 전문가들의 평균적 의견에 따랐을까?


결과가 무척 흥미롭다.

하버드생들은 일단 평균치를 무시하였다. 사실 가장 합리적이고,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정답은

3.4도라는 기후 학자들의 평균치를 따르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평균은 없는 것처럼 취급하였다.

기저율 무시(base-rate neglect)라고 알려진 심리학적 현상이 똑똑한 하버드생들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더 재밌는 것은 하버드생들이 자신의 원래 견해와 부합하는 전문가의 의견만 취사선택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를 믿지 않는 하버드생들은 기온이 1.5도 변할 것이라고 추론하였고,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가 심각하다고 믿는 하버드생들은 기온이 5.4도 변할 것이라고 추론하였다.

이처럼 하버드생들은 평균이라는 수학적인 정답을 무시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과 반대 견해를 가진 전문가 의견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우리편 전문가는 진짜 전문가이자 권위자이고,

너희편 전문가는 수준 낮은 전문가이거나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연구의 시사점은 명백하다.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는

전문가 의견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지지하지 전문가 의견은 무시당하기 일쑤이고,

개개인이 지지하는 전문가의 의견만 취사선택하기 때문에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다.

전문가 의견을 취사선택하는 현상은 국민적 갈등을 부추기고,

개개인이 원래 가지고 있는 의견차이를 더 심하게 만드는 역효과만 불러올 수 있다.

정견의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서로에 대한 미움과 혐오, 증오가 쌓여가는데 이건 무척 위험한 현상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은 하나다. 전문가가 편향된 견해를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전문가는 근본적인 문제나 핵심은 따로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핵심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하면 된다.

대립하는 의견의 핵심, 대립하는 의견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공통 분모를 통찰력 있게 제시해야 전문가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가지 방안만 제시하면 된다.

전문가 본인이 기후 변화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던 아니던,

기후 변화가 (조금이라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과

그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견해를 취해야 한다.

어떤 수준으로든 기후변화가 일어나면 뭔가 예기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 자체는

정치적 성향과 상관 없는 우려이자, 공통 분모임을 제시해야 한다.

진영 간 다툼으로 서로의 의견만 앞세울 때, 이런 공통점을 찾아주고, 공통 분모를 찾아주고,

핵심을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전문가지, 싸움을 부추기고 양극화를 부추기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다.


깨끗하게 소독하여 인간에게 미치는 그 어떤 해도 없는 죽은 바퀴벌레를 물에 담갔다가 뺐다.

그 물을 먹을 수 있는가? 한 전문가는 깨끗하니까 먹을 수 있다하고,

다른 전문가는 잠재적 위험이 있으니 먹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전문가의 의견은 국민적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

전문가라면 핵심을 지적해주어야 한다. 핵심은 바퀴벌레가 아무리 깨끗해도

그것을 담갔다가 뺀 물은 사람들이 먹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변기가 아무리 깨끗해도 변기에 담긴 물을 옹달샘이라고, 정수기물이라고 생각하고 먹을 수 있겠는가?

이게 핵심이다.

이런 핵심을 지적하면서 국민들의 우려에 충분히 공감한다고,

바퀴벌레를 담갔다 뺀 물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해야 전문가다.

과학적으로는 괜찮지만,

심리적으로는 괜찮지 않은 것의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을 정부가 해야 한다고 말해야 전문가다.


전문가가 전문가다운 말을 하는 사회가 되면,

국민적 갈등이 지금보다는 줄어들지 않을까.

원하고, 바라고, 기대해본다.

(국희야. 일단 너나 잘하는 것 잊지 말고.)


*참고문헌

Sunstein, C. R., Bobadilla-Suarez, S., Lazzaro, S. C., & Sharot, T. (2017). How people update beliefs about climate change: Good news and bad news. Cornell Law Review, 102(6), 1431-1443.


*표지 그림출처

사진: UnsplashSigm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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