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뇌의 균형추구 성향이 만드는 역설적 현상
현대인들은 재미를 얻기 위해 몸부림친다.
재미가 끊어진 지루한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지하철에서 계속 재밌는 뭔가를 봐야 하고,
버스에서도 계속 재밌는 뭔가를 봐야 하며,
쉬는 시간에도 계속 재밌는 뭔가를 해야 한다.
현대인들은 책을 읽는 수고와 불편을 감수하지 않는다.
수고와 불편은 피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꼭꼭 씹어서 설명해주고,
잘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소화까지 시켜주길 원하지,
자기 스스로의 불편한 탐구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한다.
현대의 대학생들은
대학 교수들을 학원 강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더 심하게는 학원 강사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기 스스로 공부하고, 탐구하고, 깨달음에 도달해야 하는 대학에서
학원 강사들처럼 선명하게 가르쳐달라는 요구가 점점 늘어만 간다.
매해 신입생들이 새로 들어올 때마다
학원 강사들처럼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정답을 잘 맞힐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교수들에게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가하는 압력이 강해져 간다.
재밌는 뭔가를 하기 어려운 수업 시간은 이들에게 절망이다.
그래서 자꾸만 수업 시작 후에 나갔다 들어오는 학생들이 늘어간다.
한번 나가면 함흥차사다.
20분 있다 들어오는 학생.
30분 있다 들어오는 학생.
수업 끝날 때쯤 들어오는 학생.
마음 같아서는 다 결석처리 해버리고 싶지만 꾹 눌러서 참는다.
다들 책상위에서 노트북이나 태블릿PC를 꺼내 놓고 있는데,
과연 내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내가 웃긴 이야기를 하는 타이밍에 웃지 않고,
전혀 엉뚱한 타이밍에 웃는 학생이 너무 많다.
혼자 재밌는 것을 보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심지어는 구석 자리에 앉아서 이어폰을 끼고 수업을 듣는 학생도 있다.
수업 시간에 다소 즐겁지 않은 이야기
평소에 해보지 않은 생각을 해보는 그 불편함을
감수하기 싫다는 것을 온 몸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
귀를 틀어 막았으니 말이다.
좋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학에 계속 다녀주고,
행복할 수 있다면, 교수인 내가 참아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이 무슨 조화인지.
이 무슨 역설인지.
그렇게 지루한 걸 못참고,
잠시라고 쾌락과 재미가 끊어지는 것을 못참는
현대의 대학생들이, 좀 더 확장해서
현대의 10대, 20대들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가장 불행하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현대의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이전에 있었던 그 어떤 세대보다
우울과 불안 수치가 높다.
나의 경험도 이런 연구를 뒷받침한다.
학생들의 아파서 결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5년 전만 해도 독감에 걸리거나, 수술로 입원을 해야 한다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걔중에는 술먹고 술병이 난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아파서 결석하는 사유가 좀 달라지고 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해서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심각한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거나
심각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거나
심각한 공황을 가지고 있어서 정기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 받아야 하는데,
그게 수업 시간과 겹쳐서 어쩔 수 없다나.
혹은 우울증 증상이 심해져서
불안 증상이 심해져서
공황 증상이 심해서
학교에 나올 수가 없었다나.
이런 학생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 경험에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이렇게 빠진 학생들이 다음 수업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계속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일기를 쓰는 것 같은 모습도 본 적이 없다.
그냥 스마트폰을 붙잡고 즐거워하고 있다.
혼자 웃고, 혼자 즐겁고, 혼자 재밌고.
그런데 우울하단다.
그런데 공황장애란다.
그런데 불안장애란다.
참...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게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우울이라니, 공황이라니, 불안이라니.
왜 이런 역설적인 일이 발생하는 걸까?
그렇게 재밌는 것을 많이 보고 사는데,
그 어떤 시대보다 즐길 것이 많고,
실제로 즐기면서 살고 있는데,
왜 그 어떤 시대의 사람보다 요즘 대학생들이 불행한 걸까?
모든 답은 결국 우리의 인지시스템, 즉 뇌에 있다.
핵심은 우리 뇌의 쾌락-고통 균형 추구 성향이다.
우리 뇌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양팔 저울 혹은 시소의 균형을 추구한다.
우리 뇌는 쾌락과 고통 중 한쪽으로 저울이 기울면,
다른 쪽을 늘려서 다시 저울의 균형을 맞추려는 성질이 있다.
쉽게 말해보겠다.
만약 당신이 즐거움을 주는 영상을 계속 보면서
저울이 쾌락 쪽으로 기울었다.
그럼 우리 뇌는 어떻게 하겠는가?
맞다. 우리 뇌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당신에게 우울과 불안을 선사해서 고통을 준다.
열심히 재밌는 영상을 찾아서 보고,
보는 동안 즐거웠지만,
그것을 다 보고 난 후에는
허무하고, 불안하고, 우울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현대의 대학생들이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사실 하나도 즐겁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고 말이다.
당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강력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더 강력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저울이 쾌락쪽으로 더 급격히 기울면,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당신의 뇌가 당신에게 선사하는 우울과 불안, 허무함의 크기도
더 강력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울장애도 오고, 불안장애도 오며, 공황장애도 오게 된다.
왜 우리 뇌가 이따위로 되어 있냐고?
이건 사실 과학자가 할 질문은 아니다.
신학자나 종교인은 신이
쾌락을 경계하기 위해
그렇게 만드셨다고 하면 될 것이고,
과학철학자는 진화론적으로
공부하고 일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의미와 재미를 얻는 것이
생존과 번영에 유리하기에 그렇다고 하면 될 일이다.
이보다 중요한 건 현실이다.
우리 뇌는 공부하고, 자기개발하고, 일하면서
불편과 고통을 감수하고, 고통 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졌을 때,
그 균형을 잡기 위해 즐거움과 쾌감, 만족을 얻게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걸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쉽게 쉽게 하려고 하고,
재밌는 것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쾌락 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질수록
그리고 더 가파르게 기울어질수록
현대인이 경험할 우울과 불안이라는 고통도 같이 더 강력해진다.
현대인들이여.
현대의 대학생들이여.
인지심리학자와 뇌과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재미를 얻기 위해 노력할수록 우울해진다.
쾌락을 얻기 위해 노력할수록 불안해진다.
고통을 피하려고 노력할수록 우울과 불안은 거대해진다.
행복의 비결은 불편을 자처하는 것에 있다.
지루함을 감수하면 행복해진다.
불편을 감수하면 행복해진다.
책보는 고통, 운동하는 고통을 감수하면 행복해진다.
글쓰는 고통을 감수하면 행복해진다.
만드는 고통, 그리는 고통,
생산적인 일을 하는 고통을 감수하면 행복해진다.
"예술은 고통이다(Art is pain)"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를 예술가의 삶이 고통뿐이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고통을 감수할 때 예술가의 창조성과 생산성이 나오고,
예술가로서의 행복과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Life is suffering)"라는 말도 그렇다.
인간은 계속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인생을 잘 풀어가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수하고,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고통과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예술가의 행복이 고통을 감수하는 것에서 나오듯
인생의 행복도 고통을 감수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쓴 것이 지나가야, 단 것이 온다.
어쩜 이렇게 뇌과학적인 사자성어를 만들었는지.
인생 좀 살아본 우리 조상들의 지혜이자,
진리가 아닐 수 없다.
*표지 그림 출처
사진: Unsplash의Joice Kel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