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기억(Episodic memory)과 인문학적 역량
인기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말을 참 재미있게 한다.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알고 있고, 적절히 각색할 줄 안다. 누군가 어떤 영화의 줄거리 하나 제대로 기억해서 이야기하기 어려울 때, 인기쟁이들은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있고, 그 감독의 전작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있으며, 사람들이 잘 모르는 러브 스토리까지 알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푹 빠진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상태가 된다.
어쩜 저렇게 이야기를 잘할까?
똑같이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전문가라 하더라도,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전문가가 있고, 그냥 인공지능의 정의를 이야기하는 전문가가 있다. '인공지능은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입니다. 끝!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재미도 없다. 이런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참 지루하다. 또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라는 발발심이 생기기도 한다. 심지어 전문가 맞나라는 의심이 든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역사,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어 낸 사람의 스토리, 구글이 개발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알파고 이야기, 인공지능이 변화시키고 있는 기업 생태계 이야기를 하는 전문가의 말은 정말 재미있다. 말을 듣는 중에 내 머리에서 그림이 그려진다. 인공지능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이해가 안 되던 것들이 선명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학살을 일삼던 샬리아르(Shahryār) 왕이 셰헤라자드(Scheherazade) 왕비가 이어가는 이야기를 듣다가 화가 누르러져 학살을 멈추게 되었다는 천일야화(One Thousand and One Nights)는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아쉽게도 천일야화의 진짜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던 어마어마한 분량의 이야기들을 암기하고 있던 사람이다.
혹시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가?
천일야화 작가는 입담을 타고났지, 말 잘하는 사람들은 다 타고 나는 거지, 좋은 유전자를 타고나서 좋겠다.
어이구... 이런 게 타고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생각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이야기가 들어 있어 하는 걸 모르는가? 이야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우리 뇌에 다양한 이야기에 대한 정보가 기억이라는 형태로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걸 진정 모르는가?
이걸 타고난다고? 그럼 이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머릿속에 다양한 이야기를 기본 프로그램으로 탑재하고 태어난다는 말인가?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이다.
천일야화 작가가 이야기를 잘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작가의 머릿속에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고, 이렇게 열심히 외운 이야기를 새롭게 재구성했던 것이다. 실제로 아라비안 나이트의 모든 이야기는 당시 구전되던 서아시아 지역의 이야기와 그리스 문학인 《일리아드》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심지어 천일야화 작가는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이야기꾼이었던 아이소포스(소위 이솝이라 불림)의 우화(이솝우화)에 대한 지식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천일야화 시작부분에서 작가는 작중 화자 셰에라자드가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임을 밝히는데, 이는 작가 스스로의 지식이 방대함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의 머리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작가의 창작력은 작가의 암송력, 암기력에서 나온 것이지, 그때그때 이야기를 지어낸 게 아니다. 그렇게 했다면, 하루치 이야기를 쓰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작가의 이야기는 이미 기억이라는 형태도 저장되어 있었다. 모든 이야기가 이미 작가 안에 있었다. 천일이 아니라 사실 만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천일야화 작가(작중 화자인 셰헤레자드)가 매일 밤 이야기를 적절한 곳에서 끊었다는 것은 작가가 이미 모든 이야기를 구성해놓았다는 증거다. 정말 궁금할 만한 곳에서 이야기를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드라마를 볼 때 생각해보라. 정말 작가가 천재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언젠가? 정말 미치도록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끊으면서 예고편이 나올 때다! 작중 화자 셰헤라자드 왕비는 샬리아르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딱 그렇게 했다. 이는 사실 천일야화의 실제 작가가 독자를 최고로 궁금하게 해놓고, 끊어버리고, 궁금하게 해놓고, 끊어버리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천일야화를 한 번 잡으면 멈추기가 쉽지 않다. 계속 읽게 된다. 흡입력이 대단하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암송력과 암기력에 나온 새로운 이야기들은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있고, 수많은 새로운 이야기의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당신에게는 이야기가 풍부한가? 이야기를 외우고 있는가?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가?
내가 암기하고 있는 이야기가 곧 지식이고, 내가 암송할 수 있는 이야기가 곧 경쟁력이다.
일화기억(Episodic memory)를 풍부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 역량이다.
인문학적 역량을 풍부하게 해야 한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인문학적 역량은 늘 중요했고, 늘 필요했다.
혹시 아는가, 풍부한 이야기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작중 화자 셰헤라자드 왕비가 샬리아르 왕의 학살을 멈춘 것처럼
최고의 인문학 전문가들, 최고의 이야기꾼들이 세상을 구원할지 말이다. 기다려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