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나누고 합치는지가 곧 창의성이다!
사람들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타고났다'라는 말을 한다. 미술가로서의 자질을 타고났다, 운동선수로서의 자질을 타고났다, 음악가로서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식이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개인의 뛰어난 자질에 대해 타고났다고 하진 않는다. 한 개인이 아니라, 인간 전체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능력, 세상에 대해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가리켜 '타고났다'라고 부른다.
엄밀히 말해 개인의 능력은 타고났다고 보기 어렵다. 그 사람만의 경험하는 상황이 있었고, 그 사람만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이 있어서 길러진 능력을 어떻게 선천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유전자가 모든 걸 좌우한다고? 정말 이것만큼 과장되어 있고, 이것만큼 잘못 알려진 말도 없을 것이다. 물론 유전자의 역할이 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유전자가 그 역할을 할지 안 할지, 혹은 다른 역할을 하도록 경로를 변경할지는 그 사람의 경험과 환경이 좌우한다. 유전자와 환경은 언제나 상호작용하지, 둘 중 하나가 결정하는 법은 없다는 뜻이다.
그럼 인간의 지적 능력 중에 진정으로 선천적인 것은 뭘까? 언어적 능력이 없었던 구석기시대의 인간도 할 수 있었고, 현대인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은 뭘까? 성인의 발달과정에 따라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발달하고,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뭐가 있을까? 이런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학습 자체가 아니라,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일 것이고, 배우는 콘텐츠가 아니라, 배우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다. 바로 '세상에 있는 것들을 나누고, 쪼개고, 다시 합칠 수 있는 능력', 즉 '범주화(categorization)'하는 능력이다[1, 2 ,3]. 세상을 분류하는 능력이야 말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발달하고, 가르쳐 주지 않아도 하게 되는 선천적인 능력이다.
범주화는 유사한 속성들에 대한 파악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가지고 있는 자동적인 능력이다. 학습 자체가 아니라, 학습을 가능하게 하게 능력이란 이런 것이다. 유사한 속성들을 파악한 인간은 그것들을 추상화한다. 즉 그러한 유사한 속성이 있는 것들은 모두 거기서 거기인 것들, 심지어 같은 것들로 취급하는 추상화 과정을 거친다. 추상화 능력도 선천적이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할 수 있고, 학습이 아니라,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에 들어간다.
유사성 파악, 추상화, 범주화로 이어지는 과정은 매우 효율적인 학습을 유도한다. 범주화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개'와 '고양이' 다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범주화는 뭔가 복잡해 보이는 것을 단순화하고 싶을 때도 유용하다. 어떤 범주에 들어가는지만 파악하면 되기 때문이다. 범주화는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때도 유용하다.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 성격 범주에 들어가는지만 알면 되기 때문이다. 범주화는 정책과 법을 결정하는 것에도 유용하다. 이 정책과 법에 적용되는 집단의 범위는 어느 범주까지인지 기준을 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범주화는 의사 선생님들에게도 유효하다. 이런 증상이 어떤 범주의 질병에서 나타나는 것인지 파악하면 되기 때문이다. 슬슬 눈치챘겠지만, 이 세상 전체가 범주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범주화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인간은 필요에 따라 범주의 경계선을 적절히 바꿀 수 있고, 범주에 새로운 이름을 붙일 수도 있으며, 이 세상에 없던 범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범주화다. 굳이 이것에 다른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장작을 패는 도끼가, 동물을 사냥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건 범주를 바꿔 사용한 것이다. 음악을 감상이라는 취미를, 소음 차단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건 범주를 바꿔 사용한 것이다. 자동차 바퀴와 함께 도로를 누비던 타이어를, 복싱 선수의 체력 단련용으로 사용한다면, 그것도 범주를 바꿔 사용한 것이다.
고정관념이 뭔지 아는가? 범주 전환을 유연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유연하게 범주화를 다시 할 줄 모르는 것을 고정관념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사회문제도 결국 범주화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범주 전환에 대해 범주화라고 부르지 않고, 창의성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글쎄... 이게 창의성인가? 나 같은 인지심리학자의 눈엔 그저 범주화를 다시 한 것이다. 세상의 경계선을 다시 정하고, 같은 범주에 넣지 않았던 것을 같은 범주에 넣어보고,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같은 점을 찾아서 합쳐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다른 점을 찾아 쪼개 보는 것, 이런 인간의 고유 능력에 창의성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야 하나 싶다. 그냥 범주화를 잘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범주화에 관심이 많다면, 즉 대중들이 말하는 창의성에 관심이 많다면, 이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창의성은 인간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이며,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창의성이 뭔가 특별한 교육 해야 길러지는 것처럼 착각하고, 오해하고, 거짓말하는 교육은 이제 멈췄으면 한다.
범주화를 새롭게 잘하고 싶은가?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냥 사전 지식이 많으면 된다. 배경 지식이 많으면 된다.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 새로운 경계선, 새로운 기준, 새로운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이 많은 사람이 되면 된다. 이 기본적인 원리를 무시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뇌과학의 시대에 뇌과학과 자꾸 멀어져 가는 교육을 보고 있자면, 답답하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창의성 타령 그만하고, 그냥 범주화를 잘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시대의 요구에 따라, 상황에 따라,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다시 범주화할 수 있는 많은 사전 지식과 배경 지식을 갖춘 교양인들이 되면 좋으련만...
[1] Rosch, E. (2002). Principles of categorization. In D. J. Levitin (Ed.), Foundations of cognitive psychology: Core readings (p. 251–270). MIT Press.
[2] Rosch, E., & Lloyd, B. B. (Eds.). (1978). Cognition and categorization. Lawrence Erlbaum.
[3] Anderson, J. R. (1991). The adaptive nature of human categorization. Psychological Review, 98(3), 409–429. https://doi.org/10.1037/0033-295X.98.3.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