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국희 Mar 17. 2021

창의성은 새로움과 친숙함의 조화다

디즈니 최초의 창작 애니메이션 「라이언킹」과 셰익스피어의 「햄릿」

1990년의 어느 날. 디즈니의 몇몇 작가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의 주제는 그들의 표정만큼이나 심각했다.

"우리, 이대로 괜찮나?" 바로 이 주제였으니 말이다.


이 문제를 조금 풀어서 말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뜻이다. 그동안 디즈니는 '신데렐라'처럼 세상에 이미 나와 있는 시나리오들을 애니메이션화해서 돈을 벌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아무래도 아닐 것 같다. 뭔가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촉이 온 것이다.


그럼 그동안에는 왜 아무런 촉이 오지 않다가, 1990년에 촉이 온 걸까? 그런 1990년에 어마어마한 녀석이 세상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뭐냐고? 바로 인터넷이다. WWW로 시작하는 인터넷 세계가 1990년에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상세계를 관통하여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공상과학 영화나 만화에 등장하는 차원 이동이자, 순간이동이 이런 것이다. 꼭 인간이 물리적으로 순간이동을 해야 순간이동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고정관념이다. 굳이 인간이 물리적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는가? 내 생각이나 행동, 내 말이 순간 이동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순간이동한 것과 같다. 그것도 순식간에 말이다.


이런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 1990년이며, 그래서 1990년을 정보화시대 원년이자 3차 산업혁명 시대 원년인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근처에 있는 실리콘벨리에서는 이미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들이 속속 진행되기 시작했다. 1990년 인터넷의 시작과 함께 구글에 대한 초기 작업이 이루어졌고, 유튜브, 넷플릭스 등등이 그 등장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가상공간에 새로운 콘텐츠들이 매일 수억 개씩 올라왔고, 사람들은 그런 새로운 콘텐츠들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무료로 말이다! 굳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그것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재탕 삼탕 하는 그 애니메이션을 볼 필요가 없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공짜로 있는데, 굳이 디즈니까지 볼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디즈니의 작가들이 1990년에 직면한 상황이다. 어떻게 보면 이때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모은 끝에 결론을 내렸다.


"우리 이제 창작 애니메이션을 해야겠어!"


그렇다. 디즈니의 진단은 정확했다. 과거에 있던 스토리를 재탕 삼탕 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시청자들의 마음을 빼앗지 못한다. 인터넷 세계에서 웬만큼 재밌다고 하는 것들은 다 보면서, 달고 달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기존 방식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는 가져오기 힘들 것이다. 쾌락은 적응이 빨릴 되지 않던가! 아무리 맛있는 소고기도 삼시 세 끼를 먹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결심을 굳힌 작가들은 디즈니 최고경영진에게 과감하게 제안한다. "이제 우리는 창작 애니메이션을 해야겠소! 그러니 돈을 주시오!"라고 말이다. 쉽게 말해 투자를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최고경영진의 마인드는 아직 정보화시대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거절한 것이다. 사실 이건 디즈니 경영진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최고경영진은 새로운 도전을 싫어한다. 일반인들보다 위험회피 성향 혹은 손실회피 성향이 2배 정도 높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는 제안을 했다. "일단 시나리오를 써서 보여주세요. 그럼 그것을 보고 결정하겠습니다"라고 말이다.


디즈니 작가들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드디어 1차 시나리오가 나왔고, 경영진들에게 보여주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아쉽게도 탈락이었다. 경영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와 닿지 않는다. 시장성이 없다' 등등의 부정적인 평가만 내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였기에 그랬을까? '아프리카에서 사자와 함께 사는 사슴 이야기'였다. 여러분 같으면 허락했겠는가? 아무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또 써가고, 퇴자 맞고, 또 써가고 퇴자 맞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했을까? 드디어 시나리오가 통과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통과된 시나리오를 가지고 1994년 디즈니 최초의 '창작' 애니메이션이 세상에 등장했다. 성과는 어떻게 되었냐고? 놀라웠다. 1994년에 개봉한 모든 영화 중에 최고 관객수 동원과 수익 기록을 보였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2개나 받았으며, 골든글러브 상도 수상하고, 디즈니에 10억 달러(우리 돈으로 1조 원) 이상을 벌어다 주고 있는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되었다. 이게 뭐냐고? 바로 「라이언킹」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한다. 작가들이 처음에 경영진에게 선보인 아프리카에서 사자와 함께 사는 사슴 이야기는 왜 경영진의 눈에 들지 못했을까? 「라이언킹」은 왜 경영진의 마음에 든 것일까? 답에 접근해가기 위해 「라이언킹」의 줄거리를 잠깐 이야기하겠다. 「라이언킹」은 당대 밀림의 왕이자 사자들의 왕 무파사, 권력욕이 넘치는 야심가 삼촌 스카, 당대 밀림의 왕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 심바가 핵심 인물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발단은 삼촌이 하이에나들과 손잡고 계략을 꾸며 무파사를 죽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심바는 밀림에서 쫓겨나다시피 도망을 치고, 밀림의 왕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한다. 대표적인 장면은 아마 곤충을 잡아먹는 장면일 것이다. 사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심바는 자신의 정체성을 서서히 찾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귀환한다. 결국 삼촌을 죽이고 심바는 밀림의 왕이 된다.


그런데 말이다. 이거 혹시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작품명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뭐냐고? 「라이언킹」 이야기는 사실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굉장히 유사한 스토리 라인을 가진다. 「햄릿」을 보라. 야심가 삼촌이 아빠 왕을 죽이고, 그 사이 왕위 계승자였던 아들 왕자는 도망을 간다. 그러나 왕자는 다시 돌아와 삼촌을 죽이고 자신이 다시 왕이 된다. 이제 이해가 되는가? 이게 바로 '아프리카에서 사자와 함께 사는 사슴 이야기'와 「라이언킹」의 차이다. 전자는 아무런 뿌리가 없지만, 후자는 뿌리가 있다. 전자는 친숙하지 않지만, 후자는 친숙하다. 전자는 아무런 느낌이 없지만, 후자는 '사자판 햄릿'이다!



이처럼 여러분이 재미있게 본 라이언킹은 사자판 햄릿이다. 디즈니 작가들이 햄릿을 사자판으로 만들지 못했을 때는 경영진을 설득하지 못했지만, 사자판 햄릿을 만든 후에는 경영진도 설득하고, 실제로 큰 호응을 얻었다.


바로 이런 게 창의성이라는 것이다! 창의성은 내가 새롭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대중이 새롭다고 인정해주어야 창의성이고, 위험회피 성향이 높은 경영진을 설득할 수 있어야 창의성이다. 창의성은 그냥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다. 새로움 안에 친숙함이 숨어 있어야 한다. 사자의 왕위 계승 스토리는 새롭지만, 그 안에 햄릿이라는 친숙함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레트로'가 유행하는 이유도 이런 것이다. 새로운 것 안에 친숙함이 있고, 추억이 있다. 인간은 이런 것에 열광한다. 새롭기만 한 것은 사실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경우가 많다. 새로우면서 친숙해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거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새로움과 친숙함을 조화시키는 능력, 옛것과 새것을 조화시키는 온고지신의 능력을 타고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인류 역사와 인류의 문학 작품을 머릿속에 탑재하고 태어난다는 소린가?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차라리 그냥 공부하기 싫다고, 책 읽기 싫다고 말해라.


새로움과 친숙함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옛것을 많이 아는 사람이다. 옛것을 모르면 연결시킬 것이 없다. 그럼 대중들의 사랑은 받지 못할 것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예전에 있었던 것들을 섭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자판 햄릿을 만들기 위해서는 셰익스피어를 알고 햄릿을 알아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과연 '창의성, 창의성'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중에 온고지신이 창의성의 원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창의성은 타고나는 거라는 이상한 말이나 하고 말이다. 창의성만큼 노력이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창의성의 원리는 옛것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노력이다. 연결시킬 것이 많고, 조화시킬 재료가 많아야 새로움과 친숙함을 조화시키는 진정한 창의성을 달성할 수 있다.


이런 질문 하는 사람도 있다. '스티브 잡스는 정말 이 세상에 없던 스마트폰을 만들지 않았느냐고?' 그런가? 스마트폰이 정말 새로운 건가? 스마트폰 안에 있는 계산기, 이미 있던 거다. 전화 이미 있었다. 스마폰으로 하던 기능들이 이미 세상에 다 있었다. 단지 그걸 하나로 모아놓은 것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티브 잡스는 온고지신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 안에서 사용하는 아이콘들을 보라. 전화통화 버튼이 왜 옛날에 쓰던 수화기 모양이어야 하는가? 지금 이런 수화기로 전화하는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옛날 상징물만큼 전화 통화를 묘사하기 좋은 게 없기 때문에 이걸 쓰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지금 하나만 이야기했지만, 무궁무진하다.


창의성은 새로움과 친숙함의 조화다.


창의성은 온고지신이다.

이전 23화 피카소와 더 넥스트 램브란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