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모르게 술이 마시고 싶은 하루였다. 오랜만에 혼자 보내는 토요일이 아무 일도 없이 끝나는 게 아쉬웠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적당한 온도로 맞춰놓은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자니 이런 한가로움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사 온 맥주 네 캔을 냉장고에 채워 넣으며 '오늘은 김치전!'을 외치며 배달 어플을 켰다. 요 며칠간 이어진 비 때문인지 가까운 매장임에도 불구하고 배달 예정 시간까지 꽤나 시간이 걸려서 맥주 한 캔을 먼저 땄다. 기분 좋은 차가움이 식도를 타고 내려왔고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노래를 틀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괜히 더 센치해지기 때문에 노래 선곡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한 곡 한 곡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맥주를 홀짝였고 안주가 도착함에 맞춰 두 번째 캔을 꺼냈다. 안주 한 입에 맥주 한 모금. 김치전이 반 정도 사라졌을 때엔 이미 두 번째 캔의 마지막 모금만이 남아있었다. 술이 술을 부른다고, 흐름이 끊기지 않게 얼른 세 번째 캔을 가져왔고 줄곧 틀어놨던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플레이리스트가 끝나자 방은 금세 적막해졌다. 살짝 오른 취기는 나조차 쉽게 찾을 수 없도록 아주 깊은 곳에 숨겨놓은 그때를 찾게 했다. 그때에 머물러있는 그 애는 여전히 싱그러울까. 그 옆모습을 가만히 보는 걸 좋아하던 나는 살면서 두 번은 없을 사랑이 시작됐음을 직감했었다.
우리는 늘 닿아있었다. 미숙한 운전에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기어코 손을 잡고 있었고 늦은 밤 영화를 보다 잠이 들 때면 좁은 소파에 몸을 구겨 넣어 쪽잠을 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 애는 종종 편지를 적었는데 그 안에 새겨진 애틋한 마음이 내가 가진 그것과 똑같아 마음이 울렁거리곤 했다. 떨어져 있는 날이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날 위해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매일 밤 나긋한 목소리로 시를 읽어줬고 나는 가끔 그에 대한 답으로 조용히 노래를 불러줬다. 애정표현을 낯 뜨거워하던 나는 너를 만나 사랑을 말하는 법을 배웠고 아무리 뱉어내도 바다처럼 줄 지 않는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이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우리의 시간은 그토록 따뜻했다.
햇수로 딱 십 년이다. 나는 너를 묻었고 너는 나를 잊었다. 몇 년에 걸쳐 감추고 죽였던 마음은 여전히 진득한 얼룩으로 남아 가끔의 하루를 앗아가고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너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진다. 부질없는 감상에 빠져 사 온 맥주를 몽땅 비워버리고 시큰거리는 명치를 꾹꾹 누르다 이내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우리를 막을 수 없었는데. 흐르는 시간과 함께 멀어진 우리는 그 어느 날 서로의 머리에 꽂아준 벚꽃 한 송이만 남기고 찬란했던 마음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의 모든 처음을 함께 한 그 애는 여전히 노래 속에, 영화 속에, 사진 속에, 편지 속에 잔상처럼 남아 나를 글썽이게 한다.
그 애가 생각나는 노래를 틀었다. 오늘은 그 애 꿈을 꾸고 싶어서 눈이 감길 때까지 우리가 우리였던 때를 떠올리며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를 듣다, 그렇게 잠에 들었다.